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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0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Loveless> [14]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Loveless>



When You Sleep


어떤 압도적인 충격에 관한 기억 한 자락. 1994년 어느 날, 나는 한 친구의 자취방에 앉아있었다. 술 한잔 앞에 놓고 음악을 듣던 차였다. 친구는 CD를 한 장 꺼내더니 플레이어에 걸었다. 첫곡이 흐르자마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가 쇼크를 먹었다. "이게 누구냐?"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라고 영국 밴드야." 스네어 4연타에 이어 터져나오는 거대한 노이즈. 소닉 유스와는 분명히 달랐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기타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피드백도 아닌 것이, 대체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왔다. 보컬은 잘 들리지도 않고 드럼과 베이스는 앙상하게 흔적만 남아있었으며 거대한 폭포줄기처럼 부서지는 기타 같지 않은 기타가 그 모든 소리를 덮고 있었다. "요즘 애들이냐?" "어, 91년 앨범인데 이 앨범 이후 나온 게 없어." "이름이 뭐라고?"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거 참, 91년에 이런 게 있었다니, 91년은 대체 어떻게 된 해냐."

어떻긴 뭐가... 너바나의 [Nevermind] U2의 [Achtung Baby] 앨리스 인 체인스의 [Facelift]. 블러의 [Leisure], 펄 잼의 [Ten],R.E.M.의 [Out of Time ], 스매싱 펌프킨스의 [Gish].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Blood Sugar Sex Magic]..... 이런 음반들이 쏟아져 나온, 정말 아찔하기까지 했던 1년이었다. 해저에 묻혀있던 얼터너티브 대륙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바다위로 솟아올라 여러 대륙으로 쪼개진 격변기였던 것이다. 록의 진정한 90년대는 1990년이 아닌, 1년이 지난 후에나 찾아온 느낌이다. 그만한 걸작들의 행렬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계속 이어졌던 한 해였던 만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를 놓친 건 큰 죄는 않으리라. 아니, 80년대이후 브릿 팝이 융성할 때까지의 영국 록은 국내에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겨우' 3년밖에 안 지나 [Loveless]를 만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리라. 그 후 12년동안 오랫동안 중독됐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즐겨 들을, 이 앨범이 국내 발매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놀랐다. 죽었던 친구가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으며 잊고있던 만기적금을 찾은 기분이다. 주변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아마 우연히 레코드 샵에서 이 앨범을 발견한 당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바나가 [Nevermind]로 90년대의 빗장을 부숴버리며 록의 새로운 창세기를 썼다면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은 [Loveless]로 97년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로 시작될, 포스트 록의 전성기에 대한 묵시록을 남겼다. 먼 옛날, 지미 헨드릭스가 일렉트릭 기타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면,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케빈 실즈는 기타라는 악기의 정의를 새로이 했다. 그리고 음악이 일찍이 표현할 수 없던 세계를 소리의 화폭에 담아내었다. 그런 이 앨범에 대해서 1991년 11월 9일자 NME에서는 10점 만점 중 8점을 줬다. 만약 이 앨범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줄 알았다면 당시의 평자도 10점을 줄 수 밖에 없었으리라. 발매된지 15년, 정말 늦게 우리에게 도착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Loveless]가.

Love, Loveless



단도직입이다. 스네어 드럼 4비트 연타, 기다렸다는 듯이 [Loveless]에서 가장 강렬한 기타 리프, 아니 스트로크, 아니 뭐라 명명할 수 없는 소리가 압도적인 음압으로 터져 나온다. 저 핏빛 노이즈가 덮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천상의 목소리가 이끄는 몽환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서로 엉겨붙어 태초의 카오스로 빠져들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 꿨던 백일몽으로 채색된 코스모스다. 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음과 양의 파도를 그리며 고막속으로 빨려든다. 음과 양은 한 데 섞여 무극(無極)의 용액속에 녹아든다. 모든 것이 녹아들면 곧 불길한 적막이 흐른다. 그 속에서 본래의 음이 소멸된 아련한 잔향이 기타 스트링의 여진을 타고 서서히 솟아오른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절름거리며 스쳐가는 온갖 여음들과 함께 몽중인의 목소리가 걷는다. 아주 짧은 휴지, 언젠가 꿨을 수도 있는 악몽, 혹은 기억속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백일몽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다. 아니, 혼재되어 장미꽃잎처럼 흩뿌려진다. 익사 직전까지 물밑으로 들어갔다가 아주 잠시 물밖에서 호흡하는 유영이 계속 된다. 검은 물 속에서 고통스럽게 추는 춤은 사망 직전의 엔돌핀을 분비시키며 인과없는 쾌감을 부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진홍색 운무의 축제. 북유럽 신화속의 바람소리, 밀교의 무도을 울릴듯한 바이올린, 하멜른의 목동이 불었을 법한 피리소리가 기묘한 여흥을 돋군다. 하지만 마음은 되려 헛헛해진다. 긴 휴가의 마지막 밤처럼. 이미 성별의 구분이 무의미한 무성의 목소리는 흙의 아래, 구름의 위편에서 다른 트랙에 덧입혀진 신호들을 고요히 감싼다. [Loveless]는 이런 단어들을 던진다.
어느 순간에는 보컬이, 어느 순간에는 기타가, 어느 순간에는 베이스가 앞에 나선다. 하지만 한 곡 한 곡 듣다 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보컬과 기타, 베이스와 드럼은 서로의 음역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뒤섞이며 제3의 음향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피드백은 물론이요, 하울링과 드론 등 그동안 음악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던 소리들을 발렌타인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그 순간 그런 잡음들은 음악이 되어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발렌타인의 세계에 선사한다. 노이즈의 장벽, 모든 가청 주파수의 병풍이 멈춰서 있는 물보라처럼 거기에 서있다. 11곡의 노래 위를 멈추지 않는 유령처럼 떠다니는 일그러진 음의 조각들은 흩어졌다가 뭉치고, 다시 흩어진다. 이 조각들은 때로는 거울이 되어 지난 록의 역사를 훑고 지나간다. 때로는 그릇이 되어 한 시대의 에너지를 담아낸다. 그리고 때로는 몇 년 후 등장할 후예들을 잉태하는 자궁이 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자웅동체를 이룬 음과 양은 유리가루같은 욕망이 된다. [Loveless]의 욕망은 그렇게 천국과 지옥, 악몽과 백일몽,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집념이란 이름의 용광로 안에서 차디찬 플라즈마로 기화한다. 만드라고라 밭에 소리없이 내린, 핏빛의 안개비처럼. 이 완벽한 무서사의 음악은 어느 음악보다 더 짙은 드라마를 그렸다. 의식 저 편의 세상을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점묘로 찍은 추상화처럼. 그리고 이 치명적인 숨결을 들이킨 사람들은 깊은 속 어디엔가 달콤한 치명상을 입었다. 모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적어도 [Loveless]가 발산하는 자기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진통을 잊고자 귓가에 꽂은 몰핀 주사 바늘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무디기만 했다. 사실 [Loveless]야말로 어떤 마약보다 더한 진통제임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게다. 돌이켜보건데 이 마약의 가장 큰 희생자 혹은 수혜자는 바로 창시자인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앰프 앞에서 1번과 2번줄을 튕긴 후 트레몰로 암을 흔들어 드론 노이즈를 만들고, 이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잘라 붙여 반복해서 루핑시킨 후, 이를 다시 베이스와 드럼, 보컬, 다른 음원들과 뒤섞어 여지껏 존재하지 않았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 깊숙이 은둔해있던 케빈 실즈를 포함한.

Loveless Beginning


케빈 실즈는 1965년생이다. 미국의 아일랜드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10살 무렵 다시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건너갔다. 그쯤 태어난 록 뮤지션들이 대부분 그랬듯, 그에게 음악적인 충격은 70년대 후반의 펑크 혁명이었다. 앞머리를 뾰족하게 새우고 낙서를 휘갈긴 펑크 소년 케빈 실즈가 음악을 시작한 건 15살 때였다. 눈앞에서 섹스 피스톨즈와 라몬즈의 공연을 보면서 '레드 제플린 따위 시시하잖아' 느꼈던 그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가라데 경연대회에 구경 갔다가 만난 3살 연하의 꼬마가 그에게 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의했다. 그의 이름은 콤 오쿠삭이었고 자신이 드럼을 칠테니 케빈에게 기타를 치라고 했다. 하지만 생전 기타를 쳐본 적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렛을 짚고 기타줄을 긁어대는 것 뿐. 소리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조니 라몬의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펑크 키드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기타에 아무리 해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스케일이 어쩌고, 리드 기타니 뭐니 하는 것들을 배워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도 기타로 뭔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서 트레몰로 암을 계속 사용했지요. 그 때의 경험이 꽤 오랜 시간 나에게 뭔가를 줬습니다." [Loveless]의 일그러지는 기타 사운드가 계속 흔들어대는 트레몰로 암 덕분임을 생각하면 인간지사 새옹지마다. 아무튼, 몇 년을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더블린의 클럽가를 전전하던 그들은 1983년 밴드 이름을 캐나다의 B급 호러영화 제목에서 따온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으로 확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케빈과 콤을 제외하고는 멤버도 불안정했고 음악도 들쑥날쑥했다. 그들은 곧 펑크 밴드의 모양새에서 벗어나 트레몰로 암을 뒤흔들며 이상한 기타 사운드를 내는 밴드가 되었다. 동시에 '더블린에서 가장 지루한 밴드'라는 별명이 생겼다. 영국 출신이라면 런던에서 성공하는 꿈을 가지는 게 당연했겠으나 이들은 유럽으로 갔다. 유럽 어디선가에서는 자신들의 음악을 알아주는 레이블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행을 결정하자마자 케빈과 콤을 빼고 다른 멤버들이 탈퇴해버렸지만. 1984년에 발렌타인은 네덜란드에서 시작,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연을 벌였다. 1984년에는 베를린에서 첫 앨범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을 녹음, 1985년 1월 인디 레이블 타이쿤을 통해서 발매했다. 케빈 실즈가 기타와 베이스, 백 보컬을 맡고 있었으며 리드 보컬에 데이빗 콘웨이, 키보드에 당시 케빈의 여자친구였던 티나, 드럼에 콤 오쿠색으로 짜여진 라인업이었다.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는 버스데이파티나 바우하우스를 연상시키는, 고딕과 포스트펑크의 평범한 산물이었다. [Loveless]의 어떤 전조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녹음을 마친 뒤 얼마후 그들은 런던으로 향했다. 어떤 레이블도 그들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들은 데비 굿지를 베이스로 기용하고 전작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사운드의 EP [Geek]를, 1986년에는 [The New Record by My Bloody Valentine]를 발매했다. 1년차로 발매된 두 장의 EP지만 [Geek]이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The New Record by My Bloody Valentine]는 새로운 발렌타인 사운드의 전조였다. 그들이 [Geek]을 내놓은지 얼마지나지 않아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이 [Psycho Candy]로 영국을 들썩이게했고 그들의 기타 노이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 케빈 실즈는 즉각 자신의 기타 세팅으로 노이즈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팝의 훅에 노이즈를 걸어도 시끄러우면서도 달콤쌉사름한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스 록을 숭배하고 있던 데이브 콘웨이가 케빈 실즈의 달라진 음악에 조금씩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케빈 실즈는 새로운 방향을 택했고 발렌타인은 진화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데이브 콘웨이는 [Sunny Sudae Smile]을 끝으로 탈퇴했다. 발렌타인 1기는 여기까지다.

Before Loveless



1987년, 케빈 실즈는 새로운 보컬을 구한다는 광고를 음악지에 냈고 몇 명의 오디션을 거쳐 발탁된 이가 블린다 부처였다. 지금에야 '악몽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사운드위에 달콤한 백일몽을 덧입혔다'는 소리를 듣는 블린다 부처지만 초기에는 밴드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의 블린다는 전혀 성실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 타입이었는지 케빈은 블린다의 기타 세팅을 위해 몇 시간씩 허비해야했으며 합주할 때 마다 보컬의 톤을 일일이 알려줘야했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케빈이 리드 보컬을 맡고, 블린다는 코러스를 넣는 정도로 밴드의 모습이 변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3000장 한정으로 [Ecstasy]를, 이어서 [Strawberry Wine]을 연달아 발매했다. (후일 이 앨범은 [Ecstasy And Wine]이란 타이틀로 묶여서 재발매된다.) 이 EP들은 발렌타인이 완전히 고딕에서 빠져나와 노이즈로 둘러쌓인 드림 팝의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행검사증이었다. 쿵쾅쿵쾅 울려대는 드럼이 징글쟁글 흐르는 기타 멜로디를 압박하고 그 뒤편에는 케빈 실즈의 기타 앰프에서 쏟아지는 두터운 노이즈가 디스토션을 먹인 베이스와 한데 엉켜있다. 블린다 부처의 천사같은 목소리 밑에는 케빈의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어두운 음성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프리미티브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버스데이 파티, 지저스 앤 메리 체인 등의 이름이 일관성없이 지나갔다가 사라진다. 훗날 [Loveless]라는 용광로에 들어가는 원석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달콤하면서도 시끄러운 이들의 음악은 서서히 런던의 클럽가에 알려지며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 앨런 맥기의 눈에 띄게 됐다. 지저스 앤 메리 체인를 발굴한 그는 이들의 라이브에서 자신이 제작했던 것 보다 더욱 노이지한 무엇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1988년, 발렌타인은 크리에이션과 계약하고 [You Made Me Realise]와 [Feed Me With Your Kiss], 두 장의 EP를 제작했다. 뭔가가 일그러지고 꼬였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블린다 부처는 예쁘게 부르기보다는 나른하게 무슨 말인가를 내뱉고 있었다. 케빈 실즈의 음악적 두뇌는 노래를 만드는 부분과 어떻게 하면 더 광폭한 노이즈를 뿜어낼 수 있을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부분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트레몰로 암에 의해 미친 듯이 떨리는 기타줄은 앰프와 정면으로 마주선 케빈 실즈에 의해 피드백을 뿜어냈고 리버스 리버브 이펙터는 이 소음에 기묘한 울림과 진동을 입혔다. 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괴물'의 출현에 기립했지만 대중들은 기겁했다. 악명높은 그들의 라이브때문이었다. 곡과 곡 사이에는 튜닝과 세팅을 위한 40분 이상의 공백이 이어졌고 'You made me Realize'는 짧으면 15분, 길면 47분씩 확장되어 노이즈의 홍수, 아니 해일을 객석으로 쏟아냈다. 차라리 곡과 곡 사이의 긴 공백이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였다고들 하니 어떤 분위기였을지 짐작이 간다. 공연의 시작과 동시에 관객의 3분의 1이 밖으로 빠져나갔고 절반쯤 지나면 또 3분의 1이 나갔다. 남아있는 사람들만이 시공간의 개념도 잊고 일그러지는 공기를 귀로 들이 마시며 악몽의 트랜스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슈게이징 신의 지지자이자 미래의 뮤지션이었다.
다수의 험담과 소수의 찬사를 들으며 발렌타인은 1989년 [Isn't It Anything]을 발매했다.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이후 모든 게 달라진, 5년만의 정규 앨범이었다. 몇 장의 EP와 매주 한번씩은 가졌던 라이브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이 앨범에 집대성됐다. 그르렁대면서 울렁이는 노이즈와 꿈속을 해매는듯한 목소리, 파워풀하면서도 펑크적인 날 것의 느낌을 갖고 있는 베이스의 조합은 싸이키델릭이란 단어를 써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에너제틱했고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거칠었다. 또한 공격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고 흐드러진다고 하기에는 탄탄히 농축된 기운이 스며있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위아래로 흔들어온 트레몰로 암은 케빈 실즈에게 피크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돼있었다. 블린다 부처는 이제 곁가지가 아닌 플랜저, 딜레이 같은 공간계 이펙터들과 함께 몽환적 사운드의 핵심에 서 있었고 다른 멤버들의 부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라이브에서 겪었던 악명보다 더 많은 호평이 쏟아졌다. [You Made Me Realise]와 [Feed Me With Your Kiss]로 호시탐탐 그들에게 주목해왔던 영국의 음악 저널들은 "이 앨범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앨범이다"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마치 강타자의 예고홈런이 적중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Isn't It anything]을 들은 많은 청년들이 그 날로 기타를 잡고 밴드를 조직했다. 슬로우다이브, 러시, 스워브드라이브 등의 밴드가 등장하며 슈게이징 신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무대앞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신발끝만 쳐다보며 연주에만 몰두하는 밴드와 몸을 조금씩 흐느적 거리며 눈을 감고 음악에만 몰두하는 관객. 록 콘서트의 열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연장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게 됐다. 자연스럽게도 그들은 슈게이징 신의 태두처럼 여겨졌다. 1984년 시작된 발렌타인은 오랜 침식과 퇴적작용을 거쳐 버젓한 대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대륙'이 아니라 '산맥'이 됐다. 대륙이 산맥이 되기 위해서는 단층작용이 필요하다. [Loveless]가 발렌타인의 땅에 지각변동을 몰고왔다. 지진과 화산폭발, 해일이 동반된 전대미문의 지각변동이었다.

Making Lovless



사실 [Isn't It anything]만으로도 충분히 음악계를 호령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왜 3년이라는 시간을 쏟으며 [Loveless]에 매달렸을까. [Isn't It anything]이후의 슈게이징 신에 대한 반감이었다. "우리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하우스, 프라이멀 스크림류의 매드체스터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 이후로 슈게이징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붙은 '슈게이징'이란 수식어가 그리 좋게 들리지는 않더군요. 꼭 비아냥 같아서. 아마 그 당시 유행하던 슈게이징 팀들이 어렸을 때 우리 공연을 많이 보러왔고 나중에 우리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우리도 슈게이징으로 분류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밴드들 나름대로 색깔은 있었지만 그런 소리를 내기 위해서 코러스와 플랜저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그런 음악은 우리가 하던 게 아니었습니다. 문자그대로 정반대였죠. 난 관객들이 어떤 효과로 저런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그건 사이키델릭도 아닙니다. 자기가 듣는 게 뭔지 정확히 알게 되면 곧바로 무시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스튜디오에 쳐박혔다.
일사천리였다. 녹음은 몇 주만에 끝났다. 앨런 맥기를 포함한 크리에이션 관계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하면 [Isn't It anything]이후 1년 남짓 만에 발렌타인의 새 앨범을 소유할 수 있었으니까. 저널도 팬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곧' 발매될 것이라는 [Loveless]는 발매는커녕, 믹싱도 끝나지 않았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18명의 엔지니어가 그 이상의 스튜디오를 거쳤다. 57대의 기타와 43대의 앰프가 리허설 룸에 쌓여갔다. 이 숫자들은 다 돈이다. 크리에이션의 금고에서 나온. 앨런 맥기로서는 피가 마를만했다. 몇 달이면 끝날 것 같던 발렌타인의 새 앨범은 함흥차사요, 틴 에이지 팬클럽의 [Bandwagonesque]와 프라이멀 스크림의 [Screamadelica]도 만만찮은 제작비가 들어갔다. [Loveless]의 제작비가 14만 파운드를 넘어가자 맥기는 스튜디오로 쫓아가 케빈 실즈에게 통사정했다. 파산 직전이라고, 대체 작업이 언제 끝나냐고. 그 때 마다 케빈 실즈는 새앨범 수록곡의 제목으로 답했다. To Here Knows When. When You Sleep. Sometimes. Soon 같은 단어들. "케빈은 그 당시 완전히 망가져있었어요. 그는 작업의 큰 줄기를 잃어버렸고 주변 모두를 적으로 돌렸지요. 친구들과 밴드, 다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커다란 집에 스스로를 감금했고 결국은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지요." 앨런 맥기의 말대로라면 케빈 실즈는 제 2의 브라이언 윌슨이요, 그가 만들려는 앨범은 90년대의 [Smile]이 될 판이었다. 후일 노엘 갤러거도 길들인 앨런 맥기였지만 케빈 실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크리에이션은 항상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말을 할수록 우리 관계는 엿같아졌죠" 라 회상하는 케빈 실즈지만 작업이 피곤하긴 마찬가지. "나도 이 작업이 언제나 끝날지 정말 궁금했어요. 처음에는 절대 3년이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루 하루가 계속 쌓여갔어요. 심지어는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 뒤로도 3개월이 더 걸리더군요. 제길." 콤 오쿠색이 쳐놓은 드럼라인을 다시 미디로 찍어서 입히고, 녹음된 기타 소스에 온갖 이펙트를 입혀 다시 녹음하고 그것을 다시 테이프 루핑하고, 블린다 부처의 목소리를 사운드 전면에 내세웠다가 다시 맨 뒤로 빼고....이 과정에서 스튜디오에 모여있던 4명의 멤버중 데비 굿지와 콤 오쿠색이 언젠가부터 스튜디오에 나타나지 않았다. "완성되면 불러줘"라는 말과 함께.
그들이 다시 모인건 1991년 가을이었다. 케빈 실즈는 [Loveless]의 발매를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대체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라며 "이 앨범이 어떤 식으로 평가받을지 궁금합니다"라고 짐짓 겸손을 떨었다. 핏빛으로 처리된 팬더 기타가 커버사진속을 부유하고 있는 앨범이 발매됐다. 이제나 저네나 이 앨범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말 그대로 상상을 거부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이 새로운 소리의 향연은 평단을 기립시켰다. '포위된 아름다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 같은 상찬이 이어졌다. (비록 8점을 매겼지만) NME는 '[Loveless]는 (훌륭한 음악의) 기준을 높인다. 인간을 신격화한다는 건 뭔가 데카당스하지만,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은 그런 실수까지 포함해서 '존경'이상의 가치를 받을만한 밴드'라고도 했다. 브라이언 이노는 'Soon'을 일컬어 "이 노래는 팝의 새로운 표준이다. 어떤 히트곡도 이 노래만큼 모호하지는 않았다'라고 입에 침을 튀겼다. 비록 케빈 실즈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 찬양과 숭배의 여정을 거부하며 '제2의 브라이언 윌슨'이라는 평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지만. "이 앨범의 이상한 사운드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스튜디오에서 온갖 장난을 다 쳤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건 그저 단순한 기타 사운드일 뿐이에요. 나는 기타 두 줄을 트리밍하고 트레몰로 암을 사용했어요. 간단한 작업이죠.... 우리가 실제 일한 건 하루에 몇 시간씩 밖에 안됩니다. 그건 결코 완벽주의자의 방식은 아니었어요. 다만 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했을 뿐이라고요."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자. 이 앨범이 어떤 명반과 비교되고 케빈 실즈가 어떤 거장과 비교되던 간에 사실 본질은 이 말일테니까. "모든 노래가 작은 승리입니다. 우리 음악은 (음악 산업과)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애티튜드를 반영했지요. 동시에 쉽게 다칠 수 있는 어떤 불확실한 감정들의 구현이고요." 그 애티튜드의 결과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풍화되지 않았다. 록의 역사에 거대한 방점을 찍은 다른 명반들과 마찬가지로.

After Loveless



화려한 성공의 나날, 그런 건 아니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렇다. 앨범 발매 후 이들은 레코드사의 지원 한 푼 없이 투어를 돌아야했다. 크리에이션과 발렌타인은 91년 헤어졌고 계약해지 다음날 아침 케빈 실즈의 전화기에는 10여군데의 메이저 레코드사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다시 레코드사와의 갈등을 겪을 게 끔찍했던 케빈 실즈는 돈이 다 떨어진 1년 후에야 유니버설과 계약했지만 선금으로 받은 5만 파운드를 스튜디오 설립으로 단 며칠만에 날려버렸다. 게다가 [Loveless]로 한계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냈던 탓에 매일 출근하는 엔지니어에게 "오늘은 할 일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날이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 와중에 데비 굿지와 콤 오쿠삭은 각각 다른 밴드를 꾸려 팀을 떠났고 블린다 부처는 결혼해서 애엄마가 됐다. 97년, 유니버설은 사실상 발렌타인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케빈 실즈는 다른 뮤지션들의 리믹스 작업과 프라이멀 스크림의 투어 기타리스트로 생활을 이어갔다. 일본 투어에서 에어를 만나 함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음악 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고 'City Girl'을 포함한 몇 곡의 신곡을 제공했다. 90년대 초반에 작업해놓은 발렌타인의 신곡들은 아직 케빈 실즈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으며 언젠가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말이다. 케빈이 자신의 고백을 스튜디오에서 다른 멤버들에게 회고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다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던거죠. 그것뿐입니다." 현재 발렌타인은 프로모터들에게 '공연만 성사된다면 돈보따리를 들고 달려갈' 밴드 1순위다. 물론 아직까지 뮤직 비즈니스에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케빈이 돈 때문에 발렌타인을 재결성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조니 로튼이 아니니까. 그러나 15년동안 늘 떠돌았던 재결성 소문은 사실 발렌타인의 음악에 중독됐던 사람들이 꿈꾸는 어떤 지독한 희망의 발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자들은 늘어만 간다. 오랫동안 구하기 힘들었던 이 앨범을 이제 쉬이 곁에 둘 수 있게 됐다. 아마도 더욱 많은 자들이 같은 꿈을 꿀 수 있으리라. 15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낡지 않은, 어떤 순수한 음악적 희열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Loveless]이후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 것도 몰랐던' 케빈과 발렌타인의 몇 년을 같이 아쉬워 하면서.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2005년 4월 지각 라이센스된 이 앨범의 해설지 용으로 썼던 글입니다. 작년 재결성, 올해는 한국공연도 갖는다고 하여 기념으로 다시 올려봅니다. 현재 새앨범 작업중으로 국내 모 레이블에 라이센스 발매 제의가 들어온 상태라고.



by 김작가 | 2008/01/10 15:58 | 스토리 | 트랙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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