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envy
2008/06/05   엔비 <Insomniac Doze> [9]
엔비 <Insomniac Doze>

노예가 황제를 칠 때는 절박하다. 거기에는 정치적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생명의 본능만이 있을 뿐이다. 분노마저 소멸된다. 살아있기에, 생명이기에 노예는 피투성이가 되어 황제에게 창을 겨눈다. 결국 처절히 죽어갈지라도, 두려움이 아닌 결기가 최후의 눈빛을 빛낸다. 무릇 폭발하는 생존의 의지란 그런 것이다. 말살의 순간까지 비장하며 장엄하다. 일본 출신의 스크리모 밴드, 엔비는 그런 뜨거운 핏빛의 순간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95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엔비는 꽤 오랫동안 하드코어 팬들을 중심으로 지명도를 늘려 왔다. 2001년, 홍대앞 클럽에서 십여명을 상대로 첫 내한공연을 벌였을 때 까지도 그랬다. 잊혀지지 않는다. 거구의 사내들이 온 몸을 비틀며 절규하던 그 순간이. 울컥하는 마음이 용천수처럼 솟아 올랐다. 나도 모르게 양손을 들고 함께 절규했다. 관객이 몇 명이 있든, 비장함의 온도는 0.1도도 낮아지지 않고 체온계를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 후, 그들은 세계로 진출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 인디 록 애호가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원래 그렇다. 장르가 무엇이든 '진짜'는 그 벽을 언젠가 뛰어 넘는 법이다. 현재 엔비의 팬층은 하드코어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디 록 까지도 포괄한다. 그것은 그들의 음악이 결국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약자인 우리의, 억울함과 절망과 분노와 좌절을 비장한 음표의 서사시로 써내려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하는 체념을 넘어 그래도 살아가리라, 하는 결기를 끓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엔비의 아우라다.

<Insomniac Doze>는 그들의 최근작으로 국내에는 첫 선을 보이는 앨범이다. 엔비는 앨범을 낼 때 마다 하드코어/헤비 메탈의 방법론을 버려왔다. 그리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감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해왔다. 이 앨범은 그들의 고단한 여정 중 최고봉에 오른 작품이다. 묵묵히 압제를 견디다가 한순간에 솟아오르는 봉기처럼, 이들은 5분에서 10분에 이르는 모든 곡들의 러닝 타임 내내 체념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소멸한다. 희미한 등대의 불빛을 향해 헤엄치고 또 헤엄치는 표류자처럼 남아있는 에너지를 쥐어짜 어떤 극한의 경지를 보여준다. 생과 사의 한 복판인 레떼의 강에서 살아남고자 죽어간다. 6월이 밝아 오던 날, 청와대앞에 모인 수만의 인파속에서 나는 이 앨범이 듣고 싶었다. 그 장엄한 의지, 잘못된 시스템이 멋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그 단호한 결의의 사운드트랙으로 <Insomniac Doze>만한 음악은 달래 떠오르지 않았다. 봉기란 특정 개인의 의지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영웅이란 직함 따위 바라지 않고 모이고 모인 수많은 무의식이 움직일 때서야 가능한 변혁의 행동이다. 공포와 좌절을 견뎌내다 못해 마침내 일어서는 자들의 의지가 이 앨범에 담겨있다. 발에 밟혀 꿈틀대는 벌레의 몸부림같은, 아수라 속에서의 절규가 혈관에 회색 안개를 흘려 보낸다.

7월 17일, 엔비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나는 또 다시, 그들의 절규 속에서 함께 양팔을 치켜 들 것이다. 그리고 함께 울부짖을 것이다. 사육된 언어가 아닌 자연의 언어로. 언어 이전에 존재했던 야생의 소리로.


Warm Room
by 김작가 | 2008/06/05 03:48 | 음악이 해준 말 | 트랙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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