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희로애락
2009/10/16   인생의 매뉴얼 [13]
인생의 매뉴얼
또 다시 바뀐 밤과 낮탓에, 저녁에 잠들어 새벽에 눈을 떴다. 좀 기다렸다가 운동을 갈까 하다가, 밀린 원고를 오늘은 끝내야겠다 싶어서 샤워를 했다. 낮에 시연에서 사온 브라질산 원두를 갈아 모카포트에 넣고 에스프레소를 뽑았다. 핫 팟으로 끓인 물을 붓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만들어 곁에 놓았다. 노트북을 켜서 애니 데스크위에 놓고 스피커 앞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 지른 도이치 그라모폰 111주년 박스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 9번을 걸고 볼륨을 11시 반쯤으로 올렸다. 그리고 창문을 닫는다. 이 공간의 좋은 점은 방음이 잘 되는 건지, 이웃들이 모두 착한 건지 아무리 음악을 크게 틀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당초 1년만 살고 나가려고 했던 계획을 연장한 건 그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이 정도의 생활에 딱 만족한다. 요리에 재능이 있어 딱히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원하는 요리는 뚝딱 뚝딱 만들어서 먹을 수 있고, 풍요롭지는 않으나 먹고 살 만큼의 수입이 있다. 일이 없을 때는 아예 없지만 반대일 때는 몇 달 치의 이런 저런 프로젝트들이 있어 당장의 숨을 옥죄어 오지는 않는다. 청소는 영 소질이 없어 아주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폐인 인증을 하고도 남을 여느 남자들의 방에 비하면 비교적 있을 것들이 있어야할 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편이다. 양쪽 벽을 빼곡히 매운 음반과 책, 또 한 쪽 벽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오디오가 그렇다. 가고 싶은 곳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예쁘고 탄탄한 자전거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생활에 딱 만족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썩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가끔 어머니가 밑반찬을 가져다주실 겸 해서, 작업실에 들르시곤 한다. 몇 년 전까지 드셌던 압박은 동생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한동안 수그러 들었다. 그리고 조카가 100일쯤 지나 나름의 재롱과 미칠듯한 귀여움을 보여주고, 여기에 고무된 동생 부부가 둘째를 낳겠다는 선언을 하자 다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슨 압박이냐고? 당연하게도, 결혼 문제다.

예전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즘은 영, 귓가를 맴돈다. 어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것이 "너 빨리 장가가!"라는 일종의 명령이었다면, 지금은 "너도 내년에는 가야 할텐데..."라는 연민의 말투다. 이른바 적령기를 지난 나이기 때문에 중신을 서기도 힘들고, 다른 사람보다 본인이 더 마음 급하지 않겠냐는 짐작을 하시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연민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앞 문단에서 말한 바로 그런 생활 때문일 것이다. 걸핏하면 밤과 낮이 바뀌는 불규칙한 생활에, 담배는 뻑뻑 피워대고 술도 적잖이 마셔대니 어머니의 눈에는 한량도 그런 한량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전라도가 고향인데다가 오랜 자취 생활로, 정말 깔끔하고 맛있는 요리로 명절 때 마다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제수씨를 보면서, 그런 아내를 맞이한 후 이런 저런 문제를 싹 끝내고 꽤 훌륭한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동생을 보면서 큰 아들이 눈에 밟히시는 것이다. 제 딴에는 살림을 잘한다고 하지만 구석구석의 먼지와 세세한 곳의 너저분함을 모르는 척 방치하는 모습이나, 홀로 손에 물을 뭍혀 가면서 대파를 다듬어 냉장고에 집어넣고, 쌀을 씻어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여 구운 생선에 밥을 먹는 모습이 어머니가 보시기엔 고독한 홀애비의 모습에 다름아닌 것이다. 남들 다 있는 차는 커녕, 면허도 없어 자전거를 타고 서울 이 곳 저 곳을 다니는 생활이 수많은 엄친아, 아니 동생의 평범한 삶과 대조되어 '빨리 가정을 이뤄야 할텐데'라는 소망과 '언제까지 그렇게 살텐가!'라는 조소연민이 맞물려 말줄임표의 문장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 연민에 쐐기를 박은 건 지난 늦봄때의 일이다. 소개팅과 선, 중간 형태의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학교-집, 직장-집의 코스로 살아오고 있는 정말 평범한 여성이었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직장인의 세계,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이 바닥의 세계에 서로 호감을 느껴 잠시 관계를 유지했었다. 진지하게 발전되기 직전, 하지만 그녀는 그만 만날 것을 선언했다. 역시 그 알 수 없음 때문이었다. 11시나 되어야 네이트 온에 로긴을 하고, 주말마다 공연을 다닌다고 만나지도 않고, 직장인들 끼리 나눌 수 있는 화제가 나오면 갑자기 입을 닫아버리는 나와는 역시 너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의 만남에 집안 사람이 끼어 있던 탓에, 이 과정을 알고 있던 어머니의 기대가 처참히 무너진 건 너무 당연한 노릇이었다. '니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예전, 누군가가 '너는 기점이나 정류장은 될 수 있어도 종점은 될 수 없는 남자야'라고 했던 일도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애초에 연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되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생활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있는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남의 기준과 기대보다는 나의 욕망과 자유에 꾸준히 충실했을 뿐이다. 꽤 만족하고 있는, 하지만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그 삶에. 이것이 정말 만족인지, 아니면 자위인지, 또는 정신승리인지 그 숲안에 있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나의 충족도가 강해질 수록, 어머니의 연민은 깊어질 것이다. 이 나라에 존재하는, '나이에 따른 바람직하고 평균적이며 적절한 삶'의 메뉴얼과 바이블이 존재하는 한, 그 연민의 형태는 바뀔지언정 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프리터의 삶을 살면서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과년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날이 밝는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성악4중창이 때맞춰 '환희의 송가'를 부른다. 참, 묘한 아침이다.
by 김작가 | 2009/10/16 07:04 | 상수일지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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