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서태지
2008/08/30   지금 여기에 서태지는 무엇인가 [19]
지금 여기에 서태지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대형 가수가 컴백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보통은 사전에 컴백 보도자료를 뿌리고 앨범을 발표한다. 그리고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중 하나를 골라 컴백 무대를 가진다. 만약 비주얼형 가수라면 정성들여 만든 뮤직 비디오 공개도 필수다. 딱 여기까지다. 그러나, 과연 서태지였다. 시골에 미스터리 서클을 그리고 코엑스에 UFO를 띄웠다. 몇년전부터 앨범이 나온다 안나온다 설왕설래 끝에 싱글 앨범을 발표했고 그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MBC에서는 아예 한 시간을 그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사실상 그의 컴백 콘서트였던 ETP페스트는 마릴린 맨슨, 더 유즈드를 비롯한 거물들이 출연하는 록 페스티벌의 무대로 꾸며졌다. 여느 록 페스티벌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무대 장치는 이 블록버스터 컴백 작전의 절정처럼 보였다. 주위에서 아무리 부인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면 '대통령급' 의전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서태지에게 아직도 '문화대통령'이라는 딱지가 붙는건가. 그렇다면 왜 평소에는 소식조차 접할 수 없는 이 은둔의 슈퍼스타에게만 이런 비상한 관심이 쏟아지는 걸까. 왜 그의 컴백작을 두고 언제나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까. 90년대에 그가 가장 많은 앨범을 팔았던 것도 아닌데, 인기의 척도로만 한다면 그보다 강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아이돌 그룹들의 시대또한 90년대에 개화했는데. 묻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서태지는 무엇인가. 왜 아직도 서태지인가. 세상밖으로 나간 그가 다시 세상안으로 들어올 때 마다 왜 우리는 그에게 주목할 수 밖에 없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가 컴백을 한다고 했을 때 수많은 예측과 기대가 쏟아졌다. 뭘 해도 좋다, 돌아만 와다오 하는 충성파가 있었고 이번에는 또 어디서 들어본 음악을 어떻게 가져오려고 하나, 하는 냉소파도 여전했다. 하지만 서태지의 컴백 싱글 '모아이'는 적어도 후자의 예상은 뒤엎는 작품이다. 그가 최근 두 장의 앨범에서 모색했던 방법론에 비춰보자면 더욱 그렇다. <울트라맨이야>에서는 콘으로 대변되는 뉴 메탈을 수용했었고 <VII>에서는 이모 코어를 도입했다. 이 두 장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미국 10대 백인 소년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모 코어 이후, 미국의 주류 음악계에서는 록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클럽 팝과 블랙 뮤직이 여전히 강세를 보였고 화두를 던질 수 있는 록은 대부분 인디신에서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만약 서태지가 계속 최근 두 장의 앨범과 같은 길을 걷는다면 소스는 바닥났다. 그러나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소스를 길어올렸다. '네이쳐 파운드'라고 하는 장르 마케팅은 잊어도 좋다. '모아이' 싱글에서 각각의 사운드는 하나 하나가 선명히 들리고 무수히 사용된 온갖 기계음들은 심지어 청명하기까지 하다. 어떤 장르를 하더라도 적어도 사운드적 측면에 있어서는 동시대 해외의 어떤 뮤지션에도 꿇리지 않는 퀄리티를 만들어냈던 서태지였다. 그의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은 여전히 유감없이 발휘된다. 

반면 창작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지난 두 장의 앨범은 삐걱거렸다. 단순히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이 몰입해있는 해외 최신 장르를 그대로 도입한 두 앨범은 그저 재현의 의미외에는 없었다. 이 때 부터 그에게 '장르 수입상'이라는 조소어린 별칭도 등장했다. 하지만 '모아이'는 그런 오명을 벗어 던지기 충분해보인다. 서태지는 이 싱글을 통해서 드릴 앤 베이스, IDM, 토이트로니카 처럼 일반인에게는 이름조차 낯설 다양한 장르를 흡입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주류 음악계에서는 잘 쓰이지도 않는, 철저한 하위 장르이자 이른바 매니아용 음악이다. 그런데 서태지는 그런 장르들을 조합해 최근 어느 앨범보다 대중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저 복잡하게 쪼개지는 비트와 낯설지만 적확한 온갖 음향위에 예의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마치 동요라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애수어리며 발랄하고 천진한 멜로디를 얹는 것이다. 이런 작업 방식은 서태지가, 정확히 말하자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세상을 평정할 수 있었던 주요한 무기다. 서태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스타일의 뮤지션이 아니다. 그의 재능은 상이한 음악적 재료들을 기가 막히게 섞어서 대중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아직도 표절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난 알아요'에서 중간에 스래시 메탈 리프를 넣음으로서 록과 댄스의 물리적 결합을 시도했던 그는 1993년 '하여가'를 통해 이를 화학적 결합의 단계로 끌어 올린다. 본토에서 조차 이런 형태의 음악이 상업적으로도 히트했던 건 그로부터 1년 후, 앤스랙스와 퍼블릭 에네미의 'Bring The Noise'에 이르러서였다. 데뷔전 그의 취향이었던 메탈과 댄스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서태지의 욕망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하여가'는 록과 랩 뿐만 아니라 국악적 요소까지 끌여들었으니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대중들이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혹은 삽시간에 열광으로 바뀌었지만.

그런 그의 재능이 정점에 올랐던 작품은 1998년의 솔로 1집이었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인더스트리얼과 모던 록, 얼터너티브 록과 사이키델릭등을 마구 뒤섞으면서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실험적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렇듯 '조합'을 미덕으로 하는 뮤지션인 서태지가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재현'의 단계에 머물렀으니 평가가 갈린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아이' 싱글은 서태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선보인다. 한국에서 이런 비트와 사운드를, 그것도 주류 대중음악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다. 여기에 이토록 설득력있는 멜로디가 더 해지니, 이것은 서태지를 서태지로서 존재하게 했던 바로 그 음악이다. 서태지가 가장 잘하는 것, 그리고 가장 잘해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모아이'가 있는 것이다. 그가 음악적으로 90년대를 리드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새로움'이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게 아닌 하이브리드에 있었다는 걸 '모아이'는 다시 환기시킨다. 빌보드의 경향에 충실한 현재의 대중음악계에서 과연 이런 탈(脫)빌보드적 음악이 얼마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즉 어딜가나 서태지의 음악이 흘러나와 마치 시대의 공기처럼 느껴졌던 시대의 분위기를 불러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때 서태지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향수를 리노베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모아이'의 기조가 곧 공개될 8집 앨범 전체를 구축하는 틀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물어야겠다. 서태지가 과연 음악만으로 영광의 시대를 누렸을까? 오직 음악만으로 권좌에 올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늘 기성세대와의 불협화음을 냈고 싸우고 투쟁했다. 그게 본의였던 아니였던 그런 과정을 거쳐 한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데뷔때부터 그랬다. 이 '듣도 보도' 못한 음악을 기성 작곡가와 가수, 평론가들이 모두 혹평했지만 신세대는 단숨에 '난 알아요'에 빠져들었다. 어느 점잖은 학자는 서태지의 랩이 우리말을 오염시킨다고 혀를 찼지만 그의 언어는 곧 새로운 세대의 언어였다. '하여가'에서 레개 파마와 귀걸이등으로 인한 방송 출연 금지 파문을 불렀다. 이는 곧 패션의 정치학이 됐다. '교실 이데아'는 단선적이나마 정면으로 교육 현실에 문제 제기를 한, 주류 음악 최초의 사례였다. 고등학교 중퇴라는 그의 학력이 이 노래와 맞물려 더욱 힘을 얻었다. '컴백홈'은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며 음악과 메시지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전무후무한 사례가 됐다. '시대유감'은 오랜 세월 음악계의 숙원이었던 사전 심의 철폐의 방아쇠였다. 이 모든 것들이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한 92년부터 96년까지, 단 5년 동안 벌어졌던 일이다.

그 때 서태지의 음악은 곧 이 사회속에서 변화를 이끄는 기폭제였다. 아니,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과 존재 자체가 그랬다. 사회를 바꾸는 걸 정치라 할 수 있다면, 자의와 타의의 알 수 없는 비율로 서태지는 문화정치를 했던 셈이다. 그렇기에 김건모보다 음반판매량이 적었어도, H.O.T보다 아이돌성이 낮았어도 그 누구도 누려본적 없는 '문화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태지라는 기표안에 그토록 다양한, 그것도 전대미문의 사회적 기의가 있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90년대의 서태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양현석, 이주노와 함께 할 때의 서태지다. 그는 98년 컴백하면서부터 일체의 사회적 트러블을 만들지 않아왔다. 모든 트러블로부터 도피해 해외에서 은둔했다. 가사에서 조차 예전만큼의 메시지가 담긴 건 '인터넷 전쟁'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기존의 메시지가 권력과 제도를 과녁으로 삼았다면, '인터넷 전쟁'의 그것은 차라리 공허했다. 그렇다. 그는 은둔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문화로부터 지워왔고, 음악역시 탈사회의 길을 걸어왔다. 스스로 사회로부터의 맥락을 거세한 것이다. 어쩌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선언은 음악활동으로부터의 은퇴가 아닌 서태지라는 기표가 짊어진 수많은 기의로부터의 은퇴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 그가 소통해온 대상은 사회, 즉 '우리'가 아니라 팬덤, 즉 '그들'이었다. 서태지는 팬덤안에서는 여전한 영웅이자 대장이었으되, 그 바깥에서는 차츰 냉정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철저히 비대중적 장르를 재현한 두 장의 앨범은 아와 피아를 가르는 시기가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었던 온갖 비난들이 쏟아진 것도 그 때부터 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 '그들'과 소통하며 네버랜드에서 살아왔다. '모아이'에서 서태지는 이렇게 노래한다. "네온사인 덫을 뒤로 등진 건 /내가 벗어두고 온 날의 저항 같았어 /떠나오는 내내 숱한 변명의 노를 저어/내 속된 마음을 해체시켜 본다." 모든 기의를 집어던진 한 개인의 고백이자 이제 자연인으로 서겠다는 선언이라 봐도 좋을까. 세상이 이 고백과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서태지의 기의는 여전히 살아서 거리를 배회하는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귀환에 지상파에서는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해외 유명 뮤지션들을 불러 콘서트가 아닌 페스티벌을 만들었다. 정현철이라는 개인이 아닌 서태지라는 의미의 총체를 위해. 전직 대통령이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 없듯이 서태지의 기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봉인되어있을 뿐이다. 코엑스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가졌을 때 서태지는 "지금이 시대유감"이라는 발언을 했다. ETP에서는 "이 노래를 만들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요"라는 말을 했다. 둘 다 '시대유감'을 부르기전 했던 말이다. 그 순간, 예전의 기의가 지금의 서태지에게 겹쳐보였다. 이제 환영 또는 추억이 된 그 숱한 의미들이 조명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촌스러운 상상을 했다. 만약 촛불정국 당시 그가 광화문에 나타났다면 과연 얼마나 가공할만한 사건이 벌어졌을까. 그가 거기 없었다고 아쉬워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 아닌 다른 누구도 '가공할만한 사건'의 촉매제로 떠올릴 수 없을 뿐이다. 그가 아무리 개인으로 서고자 해도, 세상은 상징으로서의 서태지를 볼 수 밖에 없다. 어떤 음악을 들고 나와도 마찬가지일 거다. 서태지의 아이러니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시사IN 50호 기사의 원본.

by 김작가 | 2008/08/30 20:24 | 스토리 | 트랙백 | 핑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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