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만화
2008/06/25   마음대로 추천만화 11 [9]
마음대로 추천만화 11


소라닌: 어느 일본 소도시의 여름 풍경을 찍은 커버가 산뜻하다. 얼핏 제목과 커버만으로 봐서는 아다치 미츠루류의 '일상 스포츠 만화'정도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 <소라닌>은 음악만화다. 밴드의 성공담이라던가, 천재의 역경일지라던가 하는 음악만화가 아니라, 밴드를 통해 상처를 극복하고 꿈을 꾸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친구들의 이야기다. 과장도 부족함도 없는, 적당한 여백이 내내 흐른다. 청춘의 오후이자 인생의 느긋한 화양연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같은 일본 독립영화의 팬이라면 필독.



벡:  밴드 만화의 새로운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 챕터의 커버를 역사적 명반의 패러디로 꾸민 센스부터, 라이브 클럽의 디테일한 풍경까지 진짜 음악에 평생을 바쳤던 오타쿠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가득하다.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 처음 밴드를 결성했을 때 누구나 한번 쯤 그려봤을 로망이다. 기타의 명가, 펜더에서는 주인공 유키오가 극중에서 사용하는 노란 기타를 실물로 제작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언젠가부터 헤비 메탈은 음악 최고의 개그 소재가 됐다. 그러니 극히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쌍팔년도 메탈 뮤지션들이 지금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은 M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대학에 간다거나,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하는 것 뿐이다. 데스 메탈은 더욱 그렇다. 그래도 꿋꿋이 어둠의 노이즈를 만들어가고 있는 형들이지만 한 시대를 강타했던 데스 메탈은 사타니즘을 숭배했던 열혈 고교 시절의 일화를 술자리 안주용으로 쓰일 뿐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는 메탈의 바로 그 개그 코드를 꼭지점까지 끌어올린다. 악마계 데스 메탈의 최고봉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리더인 카이저 2세가 사실은 시부야계 음악의 광팬으로 기타팝 밴드를 꿈꾸는 숫총각 소이치라는 설정.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스쿨 오브 락>을 보며 낄낄거렸던 당신, 당장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 열광할 준비를 할지어다.


 

교도관 나오키: 사형은 올바른 제도인가? 세필만으로 작품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고우다 마모라의 최근작 <교도관 나오키>는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다. 사형병동에 배치받은 신참 교도관 나오키와 보복살인으로 사형수가 된 와타세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사형병동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연과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하나씩 꺼집어내면서 우리에게 사형제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던질 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왈칵,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장된 상황이나 연출이 아닌 오직 스토리의 힘이다. 원제는 <숲의 나팔꽃>. 훨씬 멋지지 않나.


호에로 펜: 만화가를 소재로 한 개그 만화,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호에로 펜>은 열혈 개그 만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열혈 만화의 전통을 열렬히 패러디해서 열렬한 웃음을 준다. 아다치 미츠루를 비롯, 실제 만화가들도 카메오로 등장하고 온갖 열혈 만화의 열혈 대사들이 인용되며 열혈 만화가 주는 그 어이없는 실소를 대폭소로 만들어낸다. 매일 마감에 쫓기는 유사 업종 관계자에게는 한없는 감정이입이 되는 작품이기도. 마감을 한참이나 어기고 있는 바로 지금, 손가락이여 불타라.


신 어둠의 목소리 궤담: 공포와 괴기, 블랙 코미디와 잔혹. 그 외 어둠의 온갖 재료들을 마녀 수프처럼 끓여 극악의 마니아들을 만들어온 이토 준지의 신작. 참 오랫만에 만나는 이토 준지지만 특유의 상상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동인 소이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다. 이토 준지의 작품을 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어떻게 똑같은 사람의 머린데, 이리도 한결같이 지랄맞을 수 있을까. <신 어둠의 목소리 궤담>도 마찬가지다. 아니, 한동안 뭔가 힘이 빠진것 같았던 최근작에 비하면 지옥의 우물물을 들이키는 기분이다. 무섭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웃기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기분 나쁘다고 하기에도 역시 그러한 이토 준지 월드의 문이 한번 더 열린다.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에는 늘 공통점이 있다. 워낙 설정도 치밀하고, 스토리의 인과관계도 탄탄해서 한 권 한 권씩 읽을 때는 답답하다. 이 작품이 시작된게 2001년, 거의 8년을 끌어온 작품이니 전편의 스토리를 다 기억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결국 완간된 후 첫 권부터 읽다보면, 끊어서 읽을 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일관된 힘과 설정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20세기 소년>도 당연히 이런 과정을 거쳐왔다. 그렇다. 나는 <20세기 소년>이 드디어 완간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히스토리에: <기생수> <칠석의 나라>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와키 히토시의 최근작.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절대 주간 연재를 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철학답게, 이 작품도 정말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알렉산더의 심복이었던 에우메네스의 삶을 그리는 <히스토리에>는 그 시대를 다룬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스펙타클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기는 마찬가지인 당대의 풍경을 치밀하게 그린다. 철저한 역사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무엇보다, 시작의 단 몇 페이지만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


심해어: <이나중 탁구부>로 긍극의 개그를, <두더지>로 극한의 어둠을 선보였던 후루야 미노루의 신작. 늘 루저들의 세계를 톤을 달리 해서 그려왔던 그의 행보는 <심해어>에서도 계속 된다. 그리고 <두더쥐>때 이미 그러했듯, 첫 몇 페이지부터 이미 압도적이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인생과 관계에 대한 철학은 더 깊어졌고, 더 기발하다. 백화점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주인공, 일생 일대의 소원은 친구를 하나 만드는 것.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고되지 않는가. 주인공에게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하며, 정상과는 거리가 먼 온갖 결핍의 루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나간다. <크레이지 군단>때부터 징조가 보였던 소외의 철학이 <심해어>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두더쥐>와 <시가테라>는 <심해어>를 그리기 위한 습작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다. <이나중 탁구부>를 끝으로 더 이상 장편을 그리지 않겠다는 후루야 미노루의 선언은 여기에서도 유효할 것 같다.



바텐더: 사실 <신의 물방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어느 날이었다. 꽤 유명한 와인바에서 자리를 갖고 있는데, 뒷 테이블 손님이 소믈리에를 부르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느끼하게 생긴 그 아저씨는 누가 봐도 된장스러운 아가씨를 앞에 놓고 소믈리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샤또 딸보를 마셨는데 왜 밀레의 '만종'이 떠오르지 않지?" 뻥이냐고? 진짜다. 그 아저씨가 분명히 문제 있는 아저씨임에는 틀림없지만, <신의 물방울>의 태도에도 분명히 문제는 있다. 하지만 칵테일을 소재로 하고 있는 <바텐더>는 밀레의 만종이니, 그리스 신화의 뮤즈니 하는 현란한 표현은 없다. 온갖 리큐르와 칵테일에 대한 꽤 흥미로운 정보와 그 칵테일을 찾는 사람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사실, 이 만화는 어찌 보면 실용서이기도 하다. 와인은 사서 마시면 그걸로 끝이지만,칵테일은 만드는 재미가 더 해지니까.



먹짱! : <맛의 달인> <미스터 초밥왕> <키라라의 일>들이 요리 만화의 메이저라면 <먹짱!>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 요리 만화다. 좋게 말해서 푸드 파이터, 안 좋게 말해서 무식한 대식가들의 이야기다. 누가 더 많이 먹나, 라는 다이어트의 적스러운 소재를 가지고 전국 먹짱 대회가 펼쳐지고.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가며 싸우고 또 싸운다. 많이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이런 어이없는 소재를 <먹짱!>은 참으로 진지하게 다루는데 그 진지함이 역설적으로, 웃기다. 굳이 말하자면 진지 개그랄까. <먹짱!>을 보다보니 학창시절의 일화가 떠오른다. 선배들이 단식 투쟁을 진지하게 논의할 때, 나는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학생회관 앞에 자장면 100그릇 배달시켜놓고 과식투쟁을 벌이는 건 어떨까요?" 매우 맞을 뻔 했다.


엘르 7월호 원고

by 김작가 | 2008/06/25 01:31 | 생각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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