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레미제라블
2010/02/27   루시드 폴: 백지위에 쓴 노래 [10]
루시드 폴: 백지위에 쓴 노래

2008년 9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학술 콘퍼런스가 열렸다.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박사를 마친 후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조윤석도 참가했다. 포스터를 붙이고 로비에 앉아 있던 중 홀연히, 행사장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자가 아닌 뮤지션. 즉 루시드 폴로서 살아가야겠다는 돈오같은 것이, 그에게 찾아왔다. 루시드 폴로서. 그러나 돈오는 아니었다. 점오에 가까웠다. 인간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하는 동물 실험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들은 조금만 익숙해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흰 쥐의 목을 비틀 수 있지만, 거부감은 버릴 수 없었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임상실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그 댓가로 돌아가는 게 한 끼의 밥이라는 사실도 끝까지 둔감해지지 않았다. 그런 나날의 결과였다. 그가 연구를 그만하고 음악만 하겠다는 결심을 만든 시간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7년간 유럽에서 쌓여 왔던 짐을 정리하고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2집 <오! 사랑>에 담긴 노래 제목이기도 한 삼청동에 집을 구했다. 인적이 드문, 한 번 들어가면 선뜻 나오기 쉽지 않은 그 집에서 그는 곡을 썼다. 네 번 째 앨범이었다. 하지만 데뷔 앨범같은 기분이었다.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전, 그가 이끌었던 밴드 미선이의 앨범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을 때 낸 작품이었다. 2001년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은 방위산업체에 다니면서 만든 작품이었고, 2집과 3집은 각각 스웨덴과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낳은 앨범이었다. 그는 애초에 음악계에 속해있지 않은 주변인이었다. 한 번도 전업 뮤지션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올 때 마다 음악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질적인 존재인 것 같았다." 그래서다. 그래서다. 네번째 앨범 <레 미제라블>이 어떤 의미에서 데뷔 앨범인 건. 이 앨범은 루시드 폴이 경계인의 신분을 떨쳐버리고 낸 첫 작품이자, 이제 전업 뮤지션임을 선언하는 출사표다.

강박이 컸던 건 당연하다. "기존에 있던 것 중 뭘 버리고, 뭘 가져가야할까 고민했다. " 홀로 나일론 기타를 뜯으며 노래하는 곡은 안 싣기로 했다. 주위에선 말렸다. 그게 너다운 거라고. 하지만 그는 관철시켰다. 연주에서의 클리쉐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에게 연주를 맡기고 그는 '음악'이 아니라 '노래'에 집중하기로 했다. 멜로디와 코드와 가사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고, '소리'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기로 했다. 오선지에 멜로디를 쓰다가, 자신에게는 오선지보다는 빈 노트와 펜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후였다. 백지에 가사를 쓰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그의 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싱어송라이터란, 소리로서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려놓은 소리에 대한 고민을, 여러 사람들이 나눴다.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들과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편곡과 합주를 했다. 녹음을 3일만에 끝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일류 세션맨들의 정갈한 연주와 60년대 브라질 보사노바의 질감을 살린 12인조 오케스트레이션의 풍성한 스트링은 앨범의 사운드를 어느 때 보다 고급스럽되, 사치스럽지 않게 만들어냈다. 그 소리 위에서, 루시드 폴은 노래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디 작은 목소리로, 인터뷰때 나눴던 대화를 녹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그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한다. 넓지 안되 깊이 들어오는 멜로디를. 정갈한 들숨과 조붓한 날숨으로.

지난 해 연말 조용히 발매되어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던 <레 미제라블>의 타이틀 곡은 '고등어'다. 시장 좌판에 얹혀있는 고등어의 시점에서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노래다.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흘러 나오기라도 하면 잠시 집중하며 가사를 의미하게 되고 아주 옅은 미소를 짓게 될, 어느 물고기의 노래다. 그렇게 '고등어'가 세상을 헤엄치는 한 편에는 용산과 광주가 있다. 용산참사를 노래한 '평범한 사람'과 광주항쟁을 다룬 '레 미제라블'. 그는 그 노래들을 하고 싶었다, 가 아니라 하고 싶었겠지,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대문은 다시 지으면 된다. 하지만 피맛골을 다시 지을 수 있나? 피맛골을 지나가면 혈압이 오른다. 폭격맞은 서울을 보는 것 같다. 사대강은? 거기 사는 새와 개구리는 어떻게 할건가. 한 번 무너지면 재생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다. 그게  너무 슬프다. 용산, 그 안에는 끔찍한 논리가 있다. 거기서 얻는 무지막지한 이익을 아무도 나누려 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이 죽은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애초에 사람이 없다." '레 미제라블'은? 왜 지금 광주일까? "공권력이 개인을 파괴하는 행위는 너무 많다. 티벳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서장의 위그르족에게도, 아프가니스탄에도, 체첸에도, 한국에서는 광주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그래서 하고 싶어 했겠지." 루시드 폴은 원래 그런 이야기들로 앨범을 가득 채우려 했다.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다 외롭고 불쌍해보인다. 처음에는 잘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더라." 많은 돈을 벌고, 10살 어린 금발의 부인과 딸 셋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석학인 그의 지도 교수는 하루 종일 하품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그의 오랜 선배는 평소 밝은 성격임에도 회사에서 공황장애를 앓았다.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앨범 하나를 만들려 했다. 거기에 다른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 역시 곡작업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는 건데, 의도하고 가사를 쓰는 게 너무 위험해 보였다. 염두에 둔 것들에 맞춰야 하니까. 중반 정도가 지나고 나서, 시작과 상관없이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시같은 가사를 쓰다가 구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가사를 쓰기로 한 시점과 맞물려, <레 미제라블>의 이야기는 풍성해졌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에는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삶의 소소하고 잡다하고 무게있는 이야기들이 여러 면에 촘촘히 박혀있는 신문같은 앨범이다.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그리고 서정적인 것들이 이런 멜로디와 사운드에 맞물려 있는 음반을 근래의 우리는 좀처럼 만난 적이 없었다. 구체적인 사건과 대상, 은유적인 묘사와 감성이 함께 머무는 앨범을 차트 1위에서 만난 적은 더욱 오랫동안 없었다. 미선이 시절부터, 루시드 폴의 노래는 대체로 그러했다. 옷을 바꿔입었다 하여 몸이 바뀌는 게 아니듯, 그는 일관된 방향으로 경계와 중심을 오가며 걸어왔다. "내 목소리에 컴플렉스가 있어. 그래서 장기 공연을 하려고. 일주일에 하루 쉬면서,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노래하면 그 보다 더 좋은 연습이 어디 있겠어." 이 장기 공연을 위해, 그가 서고 싶은 무대는 대학로 학전 소극장이다. 김광석이 노래했고, 김민기가 운영하는 학전에서 루시드 폴은 홀로 나일론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고 싶어한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시사IN에 실림.
by 김작가 | 2010/02/27 04:56 | 스토리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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