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라오스
2008/01/02   어떤 정초 [3]
어떤 정초

시계가 12월 31일 11시 59분에서 1월 1일 12시 정각으로 넘어갔다. 신년 카운트 다운을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디에도 새해를 맞이하여 들뜬 분위기는 없었다. 그저 침묵만이 있었다. 간혹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뭐 그리 축하할 일이냐고 냉소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확실한 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방콕에서 라오스로 넘어가는 심야버스라는 사실이었다. 숫자만 바뀔 뿐인 새해에 대한 기대보다는, 가본적 없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태국의 관광버스는 라디오도 틀지 않았고, 황량한 국도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그저 어둠속을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조절 버튼도 없이 미친듯이 냉기를 뿜어내는 에어컨에 사람들은 괴로운 듯, 퀴퀴한 담요를 얼굴까지 덮고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새해가 없었다.

감기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는 라오스 국경이었다. 비자를 발급받아 국경을 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수도 비엔티엔에 도착했다. 방콕보다는 기온이 낮다고 하지만, 여름은 여름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반팔에 반바지가 어색하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선 배를 채우기로 했다. 가이드북에 소개된 몇몇 식당이 눈에 보였다. 남푸 커피라는 식당에서 비엔티엔 최고라는 쌀국수를 먹으며 생각했다. '커피 가게에서 최고의 쌀국수를 팔다니, 이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 나오는 라멘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커피라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가.' 그러나 그런 의심따위 필요없었다. 정말  끝장의 맛이었으니까.

배를 채운 후 시내를 둘러봤다. 비엔티엔에는 프랑스인들이 많았다. 관광객이라고 하기에는 눌러 앉은 티가 완연한 그런 사람들이다. 라오스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탓에, 아직 관공서에는 프랑스어로 된 간판이 붙어 있고 곳곳에 식민 시절의 인프라가 남아 있는 탓이다. 어쩌면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는 이 사회주의 국가를 동경해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P.V.O. 샌드위치 가게에 하루 종일 앉아있던 배불뚝이 아저씨도 그런 사람 같았다. 시내를 한 바퀴 돌기전, 땟국물 벤 러닝 셔츠에 카키색 반바지 차림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가게앞을 지키고 있던 그는 바게뜨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연유를 넣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난 후에도 그는 마찬가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다만 샌드위치는 다 먹어 치운 후였고 커피잔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소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찌푸리고는 있었으나 감정은 읽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 앉았다. 테이블이 적어 달래 선택할 자리가 없었다. 스페셜 샌드위치와 파파야 쥬스를 시켰다. 그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는 처음이었다. 쌀국수에 이어 샌드위치, 2연승이었다. 다만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 한가한 도시가 마구 좋아지려 했다.

가게에선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외국인들도 자주 오는 가게라 그런지, 영어로 진행되는 방송이었다. 진행자는 뉴 이어 어쩌고 저쩌고를 남발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여름의 새해란, 여름의 크리스마스만큼이나 기분이 안난다고 생각했다. 뉴 이어 어쩌고 저쩌고를 남발하던 진행자는 음악을 소개했다. 시저 시스터스의 'I Don't Feel Like Dancing'이었다. 디스코 비트가 쿵짝대고 제이크 시어스는 단도직입, 팔세토를 터뜨렸다.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다리로 장단을 맞추며 함께 흥얼거렸다. 신년 기분은 안나도, 낭만의 여름이었다. 계속 옆에서 소일을 이어가던, 배불뚝이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이 음악은 왠지 아바나 비지스 같군. 요즘 음악인가?" 여전히 무표정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네는 음악을 좋아하나?"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계속 무표정하게 고개를 까닥이던 그는 "정말 아바같애. 북아프리카에서 아바를 많이 들었었지"라며 코를 후볐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밴드가 누구라고 했지?" 시저 시스터스, 요즘 뜨고 있는 애들입니다. "아아 그래, 왠지 웃긴 이름이군" 이라고 했지만 역시 웃지는 않았다. 표정에서도 눈빛에서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읽혀지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통째로 지워버린 사람 같았다. "내 이름은 쟝이야. 라오스에서 3년째 살고 있지." 여기 회사라도 다니는 건가요. "일? 그런 건 하지 않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가 없달까. 하기도 싫어. 이제는 총을 못쏘니까." 쟝은 무심히 검지 손가락이 없는 오른쪽을 흔들어보였다. 그는 용병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특수 임무를 맡은 요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다보면 시간이 사라져. 사람도 사라지지. 좋은 곳이야." 우리는 다시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파파야 쥬스를 다 마신 후, 커피 한잔을 더 시켰다. 그리고 차 한대가 앞에 와서 섰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내렸고, 프랑스어로 쟝에게 뭐라 말했다. 쟝은 한 숨을 쉬며 역시 불어로 투덜대다가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에 타기 직전 그는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시저 시스터스의 앨범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라오스에 도착해서 모르겠네요. "아, 그렇지. 고맙네. 얼마만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본건지." 차가 출발했다. 아나운서는 계속 뉴이어 타령을 했다. 이어지는 곡은 아바의 'Watertaloo'였다.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아주 미묘하게도.

by 김작가 | 2008/01/02 04:31 |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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