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룡과 자니 마

뮤지션들은 왠만해선 남의 공연을 보러 가지 않는다. 일반에게는 공연이란 게 문화 생활이지만 뮤지션에게는 일터이기 때문이다. 자기 공연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남의 공연까지 챙겨 볼 여유가 없다. 남의 공연에 가는 일은 그러니, 인사차 가거나 아니면 뒤풀이를 겨냥하고 놀러 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어릴 적 부터 동경하던 해외 뮤지션이 내한 공연을 하는 경우다. 동료가 아닌 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 10월 24일, 잠실 올림픽 공원.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2009가 열렸다. 이 날의 헤드라이너는 불독 맨션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던 팀은 크립스였다. 사실 국내에서는 별로 인지도도 없고, 본토인 영국에서도 초 A급 밴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덕후'들이 술렁거렸던 건 바로 이 팀에 전설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가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맨체스터의 로컬 밴드에서 출발해 대영 제국 전체를 휘어잡았던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보컬인 모리씨의 나르시즘 가득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언제까지고 멈출 것 같지 않은 기타 멜로디를 연주했던 그다. 아주 살짝 딜레이를 걸어 피크로 기타를 한 줄 한 줄 뜯던 그의 연주를 영국의 평단에서는 '징글 쟁글(jingle-jangle)'이라는 의성어로 표현하곤 했다. 헤비 메탈의 시대에 기타 팝의 정점이었던 스미스는 당대보다 90년대 이후에 전세계적으로도 재평가되면서 많은 한국의 기타 키드들에도 영향을 줬다. 언니네 이발관의 이능룡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GMF 공연은 25일이었지만 그 전 날 올림픽 공원을 찾은 것도 당연히 자니 마의 연주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그 날은 기아 타이거즈가 SK와의 7연전 끝에 한국 시리즈 우승, V10을 확정 지은 날이기도 했다. 열혈 타이거즈 팬인 이능룡으로서는 경기 중계를 들으며 올림픽 공원으로 오는 길이 이중으로 설레일 수 밖에 없었다.

해가 지고 크립스가 무대에 올랐다. 크립스의 노래는 아웃 오브 안중. 오직 자니 마만 보였다. 그의 연주만 들렸다. 공연이 끝났다. 이능룡은 재빨리 무대 뒤로 갔다. 그들은 이미 대기실에 들어가 있었다. 공연의 사운드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기분이 안 좋다고들 했다. 그러나 낙담할 건 아니었다. 팬 사인회 때문에 곧 대기실에서 다시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니 마에게 전해주려고 가지고 온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CD를 들고 이능룡은 기다렸다. 대기실 커튼이 젖혀지고 크립스가 나왔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하나,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망설이던 찰나. 잽싸게 그들에게 다가간 이들이 있었다. 포니였다. 마치 짝사랑하고 있는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우유부단해하는 중2 소년처럼 주저하던 이능룡과는 달리,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자니 마에게 말을 걸고 CD를 건냈다. 그렇잖아도 훤칠한 그들은 마치 셀레브리티 파티의 게스트와 같았다. 포니가 부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뭐 그런 심정이었다. 잠시의 조우를 마친 자니 마가 사인회를 위해 움직였다. 이능룡은 뛰었다.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헤이 자니? 헬로 미스터 마? 영문과를 다니고 있음에도 적잖은 영문과 학생이 그러하듯 입은 얼어 붙었다. 자니 마의 등을 툭툭 쳤다.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다시 올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의 기다림이 시작됐다. 날은 제법 추웠다. 기아의 우승에 열광하던 기분은 잠시 잊혀 졌다. 사인회를 마친 크립스 멤버들이 다시 돌아왔다. 몇 번의 찬스가 있었다. 행사용 기념 사진을 촬영할 때,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텐트로 다시 들어갈 때, 역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찬스들을 모두 날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CD나 전해주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대기실앞의 한국 스텝들에게 자니 마를 불러줄 수 있냐고 요청했다. 난색을 표했다. "그냥 CD만 주면 안될까요" 한국 스텝들은 크립스의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자니 마가 텐트 밖으로 나왔다.

스텝이 자니 마에게 이능룡을 소개했다. "당신은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기타리스트"라고 하며 이능룡은 CD를 건냈다. "오 그래? 나한테 영향을 받았는데 만약 음악이 안 좋으면 혼날 줄 알아" 이 쯤에서 뭔가 위트있는 조크로 대답하면 좋겠지만 어쨌든, 영어가 안되는 것이다. 자니 마는 정말 친절하고 젠틀하게 이능룡에게 기타리스트로서 가져야 할 자세들에 꽤 긴 덕담을 했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사용하는 기타가 뭐고 하는, 선수들끼리의 이야기는 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역시 영문과를 나왔지만 제대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영어가 짧기도 하지만 어쨌든 잉글랜드 북부 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음악 저널리스트라고 자기 소개를 하자마자 자니 마는 "너 음악 저널리스트라고?" 하면서 주먹을 내 턱에 들이대는 시늉을 했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음악 평론가란 뮤지션에게 그리 좋은 느낌의 직업은 아닌 것이다. "장난이야 장난" 허허 웃으며 그는 영국의 유명 음악 평론가인 존 새비지가 자신의 친구라며 "음악 저널리스트는 정말 중요한 직업이니까 잘 하기 바란다"는 덕담을, 역시 건냈다. 아무도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던 탓에 핸드폰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자니 마는 이능룡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기타 피크를 선물로 줬다. 한 쪽에는 The Cribs, 또 한 쪽에는 Johnny라 씌여 있는 플라스틱 피크였다.

기아의 우승에 더해 자니 마를 만나고, 거기에 그가 쓰던 피크까지 받다니! 끝내기 홈런으로 팀의 우승을 확정지은 나지완의 마음으로 그는 집에 가서 바로 스미스의 노래를 연주했다. 자니 마의 피크로. 보통 피크보다 조금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그 부드러운 피크에서 솟아나왔다. 한 소년을 기타리스트로 자라나게 한 기타 멜로디가.

BRUT 12월호
by 김작가 | 2009/11/30 17:52 | 야담과 실화 | 덧글(11)
Commented by Angela at 2009/11/30 17:54
왠지 읽다보니까 제가 오아시스 내한공연때 리암과 딱 마주쳤지만 아무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외모에 대한 찬사(?)만 늘어놓고 돌아왔던 기억이 나네요..피크 부럽습니다 ㅠㅠ
Commented by 풍엄마 at 2009/11/30 18:03
동경하던 뮤지션들의 대기실로 달려가 자신의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언니네하숙집 at 2009/11/30 19:39
끝내기 홈런을 친 선수의 이름은 나지'완'이었답니다.
이능룡씨, 참으로 부러운 소년이로군요.
Commented by Peppermint at 2009/11/30 20:04
안그래도 제가 마옹한테 싸인받을 때 한국의 많은 뮤지션들이 당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더니 really?라며 반색해 주더라구요. 조금만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지금은 꿈만 같습니다^^
Commented by oIHLo at 2009/11/30 21:49
눈물나게 부럽슴다 ㅠㅠ
Commented by James at 2009/11/30 23:01
뭐랄까, 삶에서 이런 순간이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군요. 그래야 인생은 살아갈 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두요. 부럽습니다. ^^
Commented by 카-메 at 2009/12/01 00:02
재밌네요!!! 매번 좋은 글 즐겁게 읽습니다. 감사
Commented by festa at 2009/12/01 01:41
하핫, 다음날 언니네 공연에서 능룡님이 '마 형님' 얘기 짧게 하시더라고요...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제대로 들으니 재밌군요. 저도 영문과를 나왔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살고 싶답니다.
Commented at 2009/12/01 10: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9/12/01 12:08
당연히 됐을 거라고 생각해서 올렸는데-_-;
Commented by 흠냐 at 2009/12/01 11:34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이능룡의 기타는 정말 빛이 났는데
사람들이 잘 언급을 안하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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