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에요, 쪽지를 받고
네이트온에 등록되어 있는 분이 쪽지를 보내왔다. 내일 수능이라고.

나는 수능 세대는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뭔가 자폭하는 기분이긴 한데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다.

학력고사가 무엇이냐.
존나 끔찍한거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선시험 후지원이 맞는 거지만
그 때는
선지원 후시험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학교를 여러 군데 지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딱 하나 지원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한 학교에서 두 학과를 지망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니
로또였다.

집안에서 합의한 원칙 비슷한 게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간다는 것.
그때 나의 모의고사 성적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서강대 제일 낮은 과를 가거나
안전빵으로
홍대 제일 높은 과를 가는 것이었다.

학력고사를 몇 주 앞 둔
입시지원 마지막 날
부모님과 나는
두 학교를 모두 방문했다.

아버지 친구분이 서강대 교수로 계서서
겸사겸사 얘기도 들을 겸 해서
서강대를 갔다.

겸사겸사 얘기를 듣고
캠퍼스를 둘러 봤다.

을씨년스러웠다.
몇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50분이 되니까
종이 울렸다.

엄마,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대학교야

그 때나 지금이나
TV를 보지 않지만
당시 열여덟살이었던 내가
유일하게 수요일 7시에
MBC를 틀었던 건
우리들의 천국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장동건이 데뷔했던
캠퍼스 청춘 드라마다.

그 드라마를 서강대에서 찍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우리들의 천국에 나오는 서강대와
현실의 서강대는
뭔가
열여덟살 고딩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존나 괴리감이
존나 느껴졌던 것이다.

버스를 타고 홍대로 갔다.

뭔가
드라마에서 보던 대학생들이
드라마틱하게 교정을 활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재수하는 것도 괜찮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안전하게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아버지나 엄마의 기준이 아니라
순전히 캠퍼스의 인상으로
지원을 결정했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참, 생각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대학입시날은
존나
추웠다.

시험 전 날
엄마의 절친이자
나도 참 좋아했던
혜진이 엄마가
5단 찬합에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홍대로 향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 때는 자기가 지원한 학교에 가서 자기가 지원한 학과의 교수가 감독하는 가운데
학력고사를 치루던 때였다.

홍대의 지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교 후배들은
선배를 응원하기 위해 나왔는데
우리 학교 후배들은 코빼기도 안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학교 일대에 워낙 대학이 많다보니
뭔가 서열에서 밀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

아무튼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시험은 긴장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쉬웠다.
마지막 학력고사였던데가
정권교체기의 시험이라 그런지
유달리 쉬웠다.
마구마구
문제를 풀었다.

시험에 임하기 전부터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학생이었다.

회색바탕에 검은 체크가 잘게 무늬지어있는 마이와
평범한 청바지
그리고 랜드로버 슈즈를 걸치고 있던
그 여학생은
딱 보기에도 예쁘장했다.

보통은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유독 그 여학생이
눈에 띄였던 이유는
유독 그 여학생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파르르 파르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문제가 쉬웠으니 망정이지
만약 어려웠다면 틀림없이 그 여학생을 원망했을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EBS학력고사 풀이에 맞춰서
체점을 했다.

철저하게 문과적 두뇌를 갖고 있었기에
문과적 과목은 모두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고
이과적 과목도 예상보다 매우 높은 성적을 받았다.

그날부터
마음편히
놀 수 있었다.

입학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을 갔다.

파르르 떨던 그 여학생도
동기가 되어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여학생은
파르르
떨지는 않았지만
파르스름했다.
연민지수를 만렙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파르스름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술을 배웠고 망가지는 걸 배웠다.
그리고 이 것이
대학생활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 전과는
총체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을 사는 동안
그 여학생, 아니 그 동기는
계속 파르스름했다.
보기에도 서글퍼 보였다.
오지랖이 넓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던 적도 있지만
그 때마다
그녀는
파르스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시험날의 파르라한 떨림이 겹쳐
그 친구를
아주 살짝
좋아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랬던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내내
파르스름하게 떨던
시험이 있던
일년 하고도 반쯤
그러니까
이학년 여름방학 이후였다.

이학년 여름방학
나는 조교실의 서무보조 알바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남자가 들어오더니
그녀의 자퇴신청서를 내밀었다.
애써, 놀라움을 감추고
왜 자퇴하는데요
물었다.

그녀의 동생이라고 밝힌 그는
떫더름하게 말했다.
죽었어요.
.
.
.
.
.
.
교통사고에요.
.
.
.
.
.

원어연극연습을 하고 있던 동기들에게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밤새, 우리는 술을 마셨다.
울만큼 울었던
그녀와 꽤 친했던 동기는
아예 술자리에 오지도 못했다.

계속 술을 마셨다.
이제 갓 스무살에서 스물한살이 된
대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친구의 조부모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어도
펑펑 울 수 있을 만큼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안된
그런 나이였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난
그러나 그 사건을 담담하게 곱씹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아닌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진실은
다른 것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세상과 이별을 했다는 것이었다.

건너건너

그녀가 그토록 늘
파르스름했는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사연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꽤 오랫동안
늘 술을 마셨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진 술자리에서
그렇게 파르스름했던
그 친구의 이야기는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누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다만
잔을 꺾을 뿐이었다.
이십오도짜리 진로를
십부로 따른 잔을.

내일이 수능이라는 쪽지가 왔을 때
먼저 떠오른 건
시험잘보세요, 라는 격려사보다
파르스름하게 떨던
그 여학생이었다.

쓰디 썼던
이십오도짜리 진로의
맛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학입학시험날은
춥다.

창문을 닫고 지낼 때가 왔나보다.


by 김작가 | 2009/11/12 04:34 | go20 | 덧글(8)
Commented by 양치기 at 2009/11/12 20:10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Commented by daria at 2009/11/13 00:09
이제 주변에 수능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어 수능을 보는지 마는지 암생각도 없이 지나곤 했는데 저도 학력고사 세대로서 문득 옛생각이 나네요 늙었나봐요 ㅋㅋ
Commented by 서서 at 2009/11/13 03:09
허허 수능본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사연이있을줄은....
Commented by 일월 at 2009/11/13 12:20
죽음이라는 낯설음이 수필같기 보다는 소설처럼 느끼게 하네요.
Commented by 서리 at 2009/11/16 20:53
내 대학 뒷번호 여자엔 살해 당햇어....근데 아직도 범인 못잡앗고 15년 지낫으니 공소시효도 끝낫지....이런거 생각하면 인생 너무 간단한데...난 왜 이러고 살지~~아오~
Commented by at 2009/11/19 04:26
참 슬픈 이야깁니다...........
Commented by 학생 at 2009/11/24 21:34
교수님 이 글 참 슬픈데요? ㅜㅜ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9/11/26 18:11
아니 여긴 어떻게 알고..; 학생들에게는 안 알려주려고 했는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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