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공포

예나 지금이나 지방의 문화 인프라는 척박하지만, 그래도 한 때는 지역의 음악 신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에 부산은 단연 으뜸이었다. 서울의 인디 신이 헤비 메탈 세력과의 단절을 통해 태동했다면 부산은 계승이었다. 왕년에 날리던 부산 록 기타리스트의 제자라던가 하는 방식으로 '행님'과 동생, 즉 선후배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인맥이 이어졌다. 그래서 펑크와 그런지 중심이었던 서울과는 달리 헤비 메탈의 진화형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이 역성혁명이었다면 부산은 왕위계승이었달까.

가장 먼저 전국구가 된 밴드는 레이니 선이었다. 첫번째 인디 폭발이 절정에 달하던 98년, 서울에서 첫 공연을 시작한 이래 부산과 서울을 왕래하며 공연을 하던 그들은 어떤 밴드들과도 달랐다. 암울하고 드라마틱했으며 몽환적이었다. 희노애락, 그 중에서도 '노'를 극대화시키되 '애'로 감싸는 형국이었다. 펑크와 모던록, 그런지 삼국지에서 그들은 북방의 기마민족같은 존재였다. 헤비 메탈에 뿌리를 두고 있되, '쌍팔년도'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정교한 연주를 바탕에서 뿜어나오는 소리는 검은 안개처럼 클럽을 매웠고 관객들은 넋을 잃을 채 그들의 공연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공연은 하나의 제의에 다름아니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에게는 마땅히 적절한 복식이 필요한 법. 레이니 선을 특별한 밴드로 만든 건 음악 뿐이 아니었다. 독특한 비주얼도 큰 역할을 했다. 허리를 90도로 굽힌 채, 기타 스트랩을 최대한 길게 매어 늘어 뜨리고 줄을 할퀴듯 연주하는 김태진. 어느 드러머 보다 스틱을 높이 치켜든 후, 마치 마님과의 밤을 학수고대하며 장작을 패는 마당쇠처럼 무뚝뚝하고 강하게 스네어를 강타하던 김대현. 이 둘이 각각 레이니 선이란 팀의 미드필드와 레프트윙을 책임졌다면 스트라이커는 보컬 정차식의 몫이었다.

당시 이십대 중반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이십대 중반으로 보지 않았다. 최소한 이십대 후반, 많으면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과 함께 있어도 그 또래로 보이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초등학교때부터 이미 그 얼굴 그대로였던 퍼펙트 노안이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외모도 외모였지만 펌을 한 단발과 염소 수염, 그리고 목에 거대한 염주를 두르고 무대에 올라 기마 자세로 선 후 마이크가 아니라 스탠드를 붙잡고 노래하는 그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그 자체였다. 북방 기마민족의 사제가 환생하여 뮤지션이 됐다면 꼭 그런 분위기였으리라. 모든 게 다 트레이드마크였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있었으니, 바로 맨발이었다. 무대 옆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놓고 기마 자세를 취하면, 비로소 흑암의 제사는 시작되곤 했다. 맨발은 그의 카리스마를 완성하는 용의 눈같은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 밖에 없는 게 마땅한 이치아니던가.

레이니 선이, 역시 암울하기로 따지면 천하 제일을 다투던 노이즈가든과 전국 투어를 하게 됐다. 빛 따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사나이들이 뭉쳐 전국을 돈 것이다. 어둠의 포스가 함께 하는 가운데, 레이니 선이 무대에 올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차식은 무대 옆에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마이크 까지 향하는 길. 그의 발바닥이 축축해졌다. 생수와는 다른 정체 불명의 축축함이었다. 뭔가 끈적끈적하고 기분도 나쁜 것이, 흡사 정액같은 느낌이었다. 앞 팀이었던 노이즈가든이 그 날 따라 공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사정이라도 한 것일까. 설마, 그럴리가 없다. 그 정체 불명의 축축한 액체는 노이즈가든의 보컬, 박건의 침이었다. 그 때는, 참 많은 밴드가 무대에서 침을 뱉었다. <Dookie>시절의 그린 데이가 툭하면 무대에 침을 뱉는 게 멋있던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침을 뱉었다. 특히 펑크 밴드라면 침을 뱉지 않고는 1절에서 2절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펑크도 아닌 노이즈가든의 박건은 어떤 펑크 밴드들과 겨뤄도, 아니 심지어 그린데이의 빌리 조와 겨뤄도 절대로 지지 않을 만큼의 침을 뱉곤 했다. 그러니 노이즈 가든의 공연이 끝나면 무대는 나름대로 물바다. 그 침의 바다에서 한 척의 땟목처럼 표류하는 건 정차식의 맨발이었다. 침을 밟았다 하여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면 프로가 아니다. 그는 점액의 파도를 뚫고 목적지에 기필코 이르는 선장의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기마자세를 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이크 스탠드를 쓰다듬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분노와 슬픔의 노래를 불렀다. 어쨌든 침위에 맨발로 서 있으면 누구라도 분노와 슬픔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침은 고작해야 분노와 슬픔, 정도를 안겨다 줄 뿐이다. 1999년 10월, 홍대 정문앞에 무대가 설치됐다. 거리미술전 공연이었다. 레이니 선 앞에 공연을 한 팀은 어어부 프로젝트. 공연 때 마다 특이한 퍼포먼스를 하던 보컬 백현진은 이 날 기획자에게 무대 바닥에 전구를 잔뜩 놓아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공연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를 연주할 때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발을 들었다. 그리고 전구를 밟았다. 10여개의 전구가 박살이 났다. 무대는 조금 전 까지 전구였던, 유리 조각과 유리 가루로 가득해졌다. 정차식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암울해졌다. 이번에는 침도 아니고 무려 유리 조각인 것이다. 발바닥이, 떨렸다. 백현진은 노래했다. ‘남자는 그날부터 소주대신에 침묵을 마시며 사네’ 그리고 다시 한 번 발을 들어 유리 조각을 밟았다. 정차식은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충격과 공포의 침묵이었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BRUT 10월호

by 김작가 | 2009/10/01 21:44 | 야담과 실화 | 트랙백 | 덧글(8)
트랙백 주소 : http://zakka.egloos.com/tb/424673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33 at 2009/10/01 22:31
이거 엄청 웃기네요.

요즘 정차식씨가 노래 부르면, 멘트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웃더군요. 저도 듣다가, 멘트 듣다가 웃었습니다. 너무 웃겨서.
Commented by at 2009/10/02 01:31
왔다가 무지 웃어요~
윗분 리플도 너무너무 와닿고.ㅎㅎ
글 중 정차식씨 내용은..겉은 참 번지르르한데 (구수한) 욕만 가득한듯;
굉장히 암울,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에 휘몰아치는 카리스마이기는 한데,
입만 열면 의외의 부산 사투리에서 반전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언제던가 저번에 날씨가 우중충했던 공연날
"날씨가 꿉꿉~한게~" <<에서 한 3백명이 동시에 뽱! 터졌던 기억이.ㅋㅋㅋ
Commented by nugoo at 2009/10/02 11:39
경남도 오리지날 보리문둥이로서 '꿉꿉'에서 빵 터질 수 있다는 게
졸라 신기하네염 우왕~
Commented by ee at 2009/10/02 16:23
정차식씨 말투 및 억양, 목소리는 아주 특이합니다. 단순히 생소한 단어를 써서 빵 터지는 게 아니죠. 정차식씨는 요즘 예능에서 활약하는 김태원씨 정도는 그냥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웃긴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당근매니아 at 2009/10/02 03:33
김작가 님이 이글루를 하셨었군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atyspil at 2009/10/02 09:47
제가 모르는 시절의 레이니선이로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리나 at 2009/10/03 03:06
아흑 차식이 횽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종종 와서 좋은 글 많이 보고 있습니다. ^^
Commented by at 2009/10/04 21:52
ㅋㅋㅋㅋㅋㅋㅋ이런글이 어쩌다 이오지마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음악 친구나 해요
by 김작가 2008 이글루스 TOP 100
Calendar
메모장
noisepop@hanmail.net
http://twtkr.com/GrooveCube
카테고리
전체
음악이 해준 말
생각
스토리
대화
어른들의 놀이터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상수일지
아주 특별했던 봄
아주 특별한 여름
go20
private press
NM
야담과 실화
바벨의 콘서트
VS 칼럼
자전거 라이프
방명록
비밀의 창고
미분류
포토로그

보이는 것의 날인
태그
어떤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인디 아이돌 철학성향테스트 이런들어떠하리저런들어떠하리 블로그 들뢰즈 매시브어택 2010 이병우 밥딜런 FnC 오아시스 씨엔블루 페스티벌 맑스 문화정책 전망 국카스텐 그린데이 글래스톤베리 레미제라블 내한공연 루시드폴 VampireWeekend Contra 아감벤 트위터
전체보기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