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세계
할아버지 추도식이 있었다. 어릴 때 부터 큰집과 동네에 살아서 큰집에 가는 일은 부담스럽지 않다. 작업실에서 큰집까지, 슬슬 자전거로 8분 정도가 걸렸다. 도착한 시간은 일곱시 반. 예배는 끝나고 온 집안어른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보통은 추도식에 잘 가는 편이 아니다. 집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둘러대고 빠진다. 내 또래 친척들이 다들 바쁘고 멀리 사는지라(그래봐야 수도권) 잘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큰 아버지의 두 아들, 그러니까 나이 차가 5-7년 정도 나는 사촌형들 정도가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따라서 내가 가봤자 썰렁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잘 안갔다. 그런데 오늘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간 이유는 역시, 또래 친척들이 모두 모인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안의 가계도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버지의 형제는 3남 2녀. 가장 먼저 결혼한 큰고모가 1남2녀, 큰아버지가 2남, 우리 아버지가 2남, 작은 고모가 1남 1녀, 작은 아버지가 1남 1녀를 각각 두고 계시다. 2세들은 80년대 초반부터 후반 학번까지, 90년대 초중반부터 후반 학번까지로 나뉜다. 80년대 학번 2세, 즉 사촌형 누나들은 진작 결혼해서 다들 잘 살고 있고 근 몇년 사이에 90년대 초반부터 후반 학번 2세, 즉 친동생,사촌동생들이 줄줄이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오늘 최초로 줄줄이 결혼한 사람들이 모두 아기를 동반해서 큰집에 모이는 날이었던 것이다. 2달전 태어난 동생의 딸까지 포함해서 총 12명의 친조카가 현재 있고, 그 중 오늘 모인 조카의 인원은 그 중 총 7명이었다. 모인 조카 중 가장 큰 놈은 중학교 1학년 막내는 2개월이니, 이걸로도 충분히 넓은 스펙트럼인데 큰 사촌 누나의 딸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니 현재까지 3세의 나이차는 19년에 이른다. 2세중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세 명 남았는데 막내 사촌들이 먼저 결혼해서 애를 낳는다치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이 문단을 쓰면서 손가락을 몇 번이나 헤아렸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조카를 보기 위해서 간 건 아니었고, 역시 오랫만에 사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간거였다. 가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압박이, 장난 아니겠구나.


무슨 압박? 당연히 결혼 압박. 서른을 맞이하면서 시작된 집안의 압박은 해를 갈수록 강해져, 결국 재작년인가는 그 압박을 피하기 위해 연말연시에 동남아로 도피성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망명이 아닌 여행인지라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명절 및 추도식 때 마다 압박은 지속되었기에 결국 나는 두드릴 수록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스스로를 연마해야만 했다. 아무리 연마된 강철이라도, 하지만 두드려지는 건 마찬가지. 이런 상황이 펼쳐질 게 불보듯 뻔했다.

손주들의 재롱에 흐뭇해 하던 어른 중 누군가 툭 던지는 한마디.
"얘! 너도 어서 가야지! 허허"
"허허허, 그러게요. 가야죠. 그런데 여자가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여자가 생기냐. 노력해야지.허허허허"
"허허허허허,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바빠서..."
이 대목에서 가만히 계시던 아버지는 살짝 노여워하시며
"얌마, 바쁘다고 결혼 못하냐?"
라고 하면서 분위기는 썰렁해질 게 분명하다.

이것은 마치, 근의 공식으로 2차 방정식을 풀 듯 뻔한 코스인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고 온갖 진수성찬이 가득한 저녁을 먹었다. 밥더먹으라는 형수들, 안부를 물으시는 어른들. 꺅꺅 거리며 삼촌을 찾는 미취학 조카들, 벌써부터 사춘기에 접어들어 낯을 가리는 초등학교 중간 학년 조카들. 그런 풍경의, 화목하기 그지없는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꼬마 조카들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더니 약속이나 한듯 곤히 자고 있는, 생후 2개월의 사촌동생앞에 모였다. 자기들도 꼬마인 주제에 애기를 신기해하며 만지작 만지작 거리더니 그것도 지쳤는지 갑자기 홀로 애기를 안 돌보는 삼촌에게 매달린다. 이제 다섯살 된 조카 하나가 외친다. "삼촌 로케트 태워줘!" 로케트? 그게 뭐지, 라며 막막해하는 나에게 동생이 역시 애를 안키워본 사람은 모르는 군, 핀잔을 날리며 조카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위로 붕 들었다가 내려주는 시범을 보인다. 이렇게 하는거야, 하면서 2개월된 자신의 딸 곁으로 가버렸다. 로케트의 맛을 막 본 조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봐, 난 이런 거 해본적 없다고. 그러면서도 으쌰, 하면서 로케트를 몇 번인가 태워줬다. 바벨을 들고 어깨 운동을 할 때의 꼭 그런 느낌이 근육에 전해졌다. 한 열 번 정도 해주니 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자, 됐지? 친절하게 웃으며 내려놓으니 바로 다른 놈이 달려 든다. "삼촌, 로케트 태워주세요!" 그래 그래 이놈, 으쌰! 헉, 왜 이리 무거워 겨우 한 살 차인데 마치 덤벨의 무게가 3킬로 그램은 된 것 같다. 누가 이 중노동을 교대해줄 것인가, 후보는 딱 두 명이다. 내 동생, 나와 동갑의 사촌.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딸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동생의 딸은 이제 2개월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3살이 되어 멀쩡히 걸어다니고 말도 잘하는 딸을 둔 사촌은? 그렇다. 다만 외면할 뿐인 것이다. 자신의 딸을 핑계 삼아, 한창 개구짓을 할 나이의 조카들을 위해 근육운동을 해야하는 고통을 그저 나한테 전가하고 싶은 것이다. 애없는 죄, 결혼하지 않은 죄의 대가는 그렇게 온전히 나에게로 왔다. 거의 삼십분에 걸쳐서 세 명의 조카를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로케트를 태워줬다. 삼각근을 넘어, 상박, 그리고 광배근까지 미친듯이 펌핑이 되는 인간 바벨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이 트레이닝의 가장 무서운 점은, 조카들을 바라보며 계속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육이요, 삼촌의 사랑이며, 정서함양의 스킨십이 아닌가. 다행히도, 조카들은 단순했다. 티셔츠가 땀에 젖어갈 무렵, 누군가가 "우리 책보자!" 하니까 또 우르르 옆방으로 뛰어가 세계명작동화를 펼치며 금세 몰두하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안도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육체의 수난이 끝나자마자 정신의 수난이 시작될 타이밍이었다. 더 타임 오브 데스티니. 밥상을 물리고 온 가족이 과일을 깎아 먹으며 롯데와 두산의 준플레이오프를 관람하는 시간. 당연하게도, 온가족이 프로야구 팬일리가 없기에 야구시합은 그저 배경화면과 배경음향일 뿐이고 이런 저런 대화의 시간이다. 주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사촌들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가고, 애기들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간다. 그리고 2차 방정식이 출제됐다. 조카 하나가 할머니! 하면서 품에 안겼을 때 였다.
"얘! 너도 어서 가야지! 허허"
"허허허, 그러게요. 가야죠. 그런데 여자가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여자가 생기냐. 노력해야지.허허허허"
"허허허허허,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바빠서..."
시합은 8회말 2사 만루. 정수빈이 대타로 나왔다.
아버지는 외치셨다.
"얌마, 바쁘다고 결혼 못하냐?"
가 아니라
"아니, 여기서 정수빈이 나오면 어떻게 해!"
아버지가 두산팬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고맙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뭔가 짜증스럽게 상황에 마침표를 찍으시는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마침표가 찍히긴 찍혀야 하는 상황.
큰고모가 말씀하신다.
"괜찮아. 쟤는 테레비에 나오잖아."
TV에 가끔 얼굴을 비춘다는 것과 결혼을 안해도 된다는 것이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지도 납득을 할 수 없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모든 어른들이
아,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겠네
라는 반응을 보이셨다는 것.

아버지는
정수빈이 삼루앞 땅볼로 물러나며 역전의 찬스를 놓친 것을
아쉬워 할 따름이셨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인
가족이라는 집단에 형성된
비밀스러운 논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실 굳이 늦도록 결혼을 안한, 또는 못한 조카를
심문하고 타박하고 문책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얘기가 나왔으니
어떤 결론을 내리긴 내려야 하는데
그 결론이란 꼭 논리정연할 필요는 없어서
그저 하나의 마침표면 되는 것이다.
볼펜이든, 연필이든, 매직팬이든, 보드펜이든
어쨌든 마침표만 찍어주면 된다.

TV에 가끔 얼굴을 비춘다는 것을 x라 하고
결혼을 안해도 된다는 것을 y라 하자.

x+y=9라는 문제가 있고
y의 값이 3으로 주어졌을 때
일반적인 세계에서는
당연히 x의 값이 6이어야하지만
가족의 세계에서는
그런 거 없이,
아무 거나 채우기만 하면

정답!


을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깨달음을 얻으며
몇 년 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선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난 말이야, TV인터뷰를 하거나 신문에 글을 쓸 때는 꼭 어른들에게 알리지"
"형, 그러면 좀 민망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데."
"마, 너도 나이 먹어봐. 내가 왜 그러는 지 알게 될거야."

과연, 이제야 나이를 먹었다는 기분이 든다.
by 김작가 | 2009/09/29 23:18 |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 트랙백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zakka.egloos.com/tb/424548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붉은거미 at 2009/09/29 23:48
하하하하 1등이네요. 글에 완전 공감하고 갑니다.
Commented by 나르실 at 2009/09/30 00:16
평소에 포스팅하시는 글 보다는 출판하신 책에 실린 글이랑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게 정말 힘겨운 시간을 헤쳐나오신 직후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군요. ^^;
Commented by 세라피타 at 2009/09/30 00:54
읽다보니 이제 추석이군요. 추석 잘 보내세요.
Commented by Leedo at 2009/09/30 01:17
그나저나 8회말 정말로 아쉬웠는데 말입니다.-_-;;
Commented by 하늘연날 at 2009/09/30 10:24
아아아... 너무 공감이 가네요 ㅠㅠb
Commented by 사막늑대 at 2009/09/30 14:36
Rancid공연을 보며 연휴를 지내는것도 좋죠~~ ㅋㅋ
Commented by at 2009/09/30 15:44
ㅋㅋㅋㅋ 고생하셨네요 ㅋㅋㅋㅋㅋ
Commented by 오리대마왕 at 2009/09/30 19:16
흑 티비에도 못나가는 중생은 어찌해야합니까!!!
Commented by PumpkinJack at 2009/09/30 20:31
아 정말 이번에는 빵터졌습니다.
하지만 롯데팬인 저는 지금 우울하네요. 흑흑
Commented by joofam at 2009/10/02 01:41
가족과 결혼과 프리랜서와..공감 하나 누릅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음악 친구나 해요
by 김작가 2008 이글루스 TOP 100
Calendar
메모장
noisepop@hanmail.net
http://twtkr.com/GrooveCube
카테고리
전체
음악이 해준 말
생각
스토리
대화
어른들의 놀이터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상수일지
아주 특별했던 봄
아주 특별한 여름
go20
private press
NM
야담과 실화
바벨의 콘서트
VS 칼럼
자전거 라이프
방명록
비밀의 창고
미분류
포토로그

보이는 것의 날인
태그
맑스 블로그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철학성향테스트 씨엔블루 내한공연 이런들어떠하리저런들어떠하리 문화정책 들뢰즈 어떤날 2010 Contra 루시드폴 페스티벌 밥딜런 매시브어택 오아시스 트위터 아이돌 이병우 FnC 그린데이 인디 전망 VampireWeekend 글래스톤베리 레미제라블 아감벤 국카스텐
전체보기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