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톤베리


런던에서 글래스톤베리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면, 게다가 티켓을 대용하는 팔찌까지 차고 있다면  열 중 서넛은 아는 척을 한다. "와우, 너 글래스톤베리 갔다 왔어? 어땠어?"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겪고 있는 일이다. 생각을 해보라. 매년 6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 페스티벌의 티켓이 4월에 오픈한다. 그것도 라인업도 거의 발표되지 않은 상태로. 그런데, 그 티켓이 며칠만에 동난다. 몇 천장, 몇 만장도 아니고 무려 15만장이. 그러니 영국인들에게, 그리고 전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글래스톤베리에 갔다왔다는 것은 일종의 성지순례를 다녀온것과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하긴, 글래스톤베리가 열리는 농장이 고대 켈트족의 종교 유적인 스톤 헨지 근처에 있으니 성지라면 성지겠다.

1971년부터 시작된 글래스톤베리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의 록 페스티벌 정도를 다녀본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의 국내 카피라이터가 글래스톤베리를 다녀온 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카피를 썼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우선, 공식적인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를 시작으로 총 15개의 공식 무대가 있으며 어림잡아 200여 팀 이상의 뮤지션들이 무대에 선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규모다. 비공식 무대, 즉 글래스톤베리에 참여하는 여러 기업이나 단체에서 세우는 무대까지 하면 헤아릴 수가 없다. 약 10만평 규모의 농장이 페스티벌의 장이 되는지라, 무대와 무대를 이동하는 데에도 최소 15분이상을 걸어야 한다. 어디 공연만 보나. 밥도 먹어야 하고, 온갖 볼거리들도 즐비하다. 그러니 하루 평균 4-5시간을 땡볕, 또는 폭우 아래서 걸어다녀야한다고 보면 된다.

출연진 역시, 모든 게 다 존재하는 라인업이다. 올해의 경우 미국의 정권 교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닐 영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헤드라이너로 초청됐다. 그리고 블러의 재결성 공연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릴리 앨런, 레이디 가가 같은 신흥 잇 걸들부터 플릿 폭시스, 본 이버 같은 포크 리바이벌 밴드들까지 무대에 섰다. 블록 파티, 프로디지, 막시모 파크, 카사비안 같은 페스티벌형 밴드들이 사람들을 미치게 한 건 물론이다. 무자비하게도 그 라인업이 툭하면 겹치기 십상이다. 즉 이 시간에 이 무대에서 이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데, 저 시간에 저 무대에서는 저 공연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둘다 장난 아닌 팀들이다. 하여, 글래스톤베리에서는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안 그러면 울화통이 터질 수 밖에 없다. 뷔페에서 모든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글래스톤베리에서 공연은 헤드라이너급을 제외한다면 '심심하고 할 거 없으면 본다'라는 분위기가 된다. 어딜가나 음악이 들리고 어딜가나 공연이 펼쳐지며 어딜가나 춤판이 벌어진다. 음악이 공기가 된다. 라이브는 물이 된다. 이 페스티벌에 오기 위해,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온갖 커스텀으로 무장한 15만 인파의 시각적 충격까지 더해지면, 내가 서있는 곳 그 자체가 바로 페스티벌이다. 굳이 공연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 구경하는 것, 고딕 의상부터 밀리터리까지 마음만 먹으면 그 즉시 원하는 스타일로(물론 명품빼고) 무장할 수 있는 마켓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족히 간다. 공연 자체는 금요일부터 삼일간 지속되지만 페스티벌 사이트, 즉 캠핑 존을 괜히 수요일부터 오픈하는 게 아니다.

글래스톤베리의 공식 명칭은 '글래스톤베리 현대 퍼포먼스 페스티벌'이다. 즉, 록과 댄스 등 음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서커스와 마임, 각종 기술을 이용한 퍼포먼스가 곳곳에 늘어서있다. 록 페스티벌로 시작한 글래스톤베리가 해를 거듭할 수록 얼마나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끌어 들였는지, 그래서 영국의 대중문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음악 외의 다른 장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페스티벌의 창시자로, 아직까지 글래스톤베리를 총책임지고 있는 농장주인 마이클 이비스는 다만 글래스톤베리를 매년 개최한다는 이유만으로 영국 음악 산업에서 영향력있는 인물로 열 손가락안에 꼽히고 있다. 영국 음악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음악적 예술들이 삼일간 총집결하니 말이다. 밤이 되면 본격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댄스 텐트들만 해도 그렇다. 댄스 빌리지라는 구역에 몰려 있는 십여개의 댄스 텐트 안에서는 모두 다른 음악이 흘러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하우스부터, 도대체 어떻게 저런 비트에 춤을 출 수 있나 싶은 드릴 앤 베이스까지. 그 텐트들이 모두 장화를 신고 춤을 추는 사람들로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룬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먹고 마시다보니 당연히 페스티벌은 전쟁터가 된다. 아침이면 화장실과 샤워실에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하는 줄이 늘어 선다. 그나마도 오후가 되면, 곱게 자란 사람들은 차마 근처에도 없는 상태가 되기 일쑤다. 심지어 인내와 체력으로 무대 맨 앞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종이컵에 대고 볼일을 보기 일쑤다. 그리고는 바닥에 툭, 으흠. 호텔? 여관? 꿈도 꾸지 마라. 관객은 물론이고 스탭과 프레스 모두 텐트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도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 글래스톤베리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즉, 글래스톤베리는 문명보다는 본능이 앞서는 곳이다. 그래야 즐길 수 있다. 일상에서 쌓아둔 껍질과 에고를 집어 던지지 않으면, 악몽이 될 수 밖에 없다. 3시간에 열번쯤 맑았다 흐렸다 비가 왔다 하는 날씨도, 평소에는 절대 신지 않을 더운 장화를 신고 온몸에 진흙칠을 하는 상황도 자신을 내던질 때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고된 일정이다. 티켓값도 적지 않으니, 말 그대로 사서 고생하는 셈이다. 그러나 글래스톤베리에 일단 다녀온 사람들은 피로가 10%도 사라지기 전에 벌써 내년을 기다리게 된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 문명을 벗어 던진 곳에 펼쳐진 또 하나의 문명. 본능과 문화만이 존재하는, 푸른 농장 위에 세워진 엘도라도. 그것이 바로 글래스톤베리기 때문이다. 고난마저 감미로운 이 신천지를 찾아, 전 세계의 페스티벌 애호가들이 깃발을 들고 몰려온다. 그 깃발로 글래스톤베리의 무대앞이 매워진다.

페스티벌이 끝난지 몇 주가 흘렀건만 나의 팔목에는 아직도 글래스톤베리 팔찌가 채워져있다. 세계 어디에서나 경험해본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승리의 시민권이다. 이 정도로 설명했건만, 나는 글래스톤베리의 10%도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지면이 많이 주어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온 이에게는 표현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에, 글래스톤베리에서의 생활을 마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을 거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마리 끌레르 8월호에 개재됨.

by 김작가 | 2009/07/25 03:24 | 스토리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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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샤방Savatage at 2009/07/27 10:54
뭐랄까, 부럽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mmented by 물빛도시 at 2009/07/27 23:40
아..엘도라도....ㅠ-ㅠ
Commented by the 주댕s at 2009/08/04 01:21
저도 내년엔 꼭 그 시민권 차고 돌아오겠습니다 !

아, 그리고 올해 글래스톤베리는 작년부터 사전예약을 받았고 올해 초에 티켓이 매진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 ㅋ
Commented by 오므라이스 at 2009/08/07 14:44
대학 졸업하기 전에 마음 맞는 친구랑 글래스톤베리 다녀오는게 소원인데, 소원성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흠.ㅋㅋ무튼 부럽네요
Commented by 세리 at 2009/10/26 22:05
이거 읽었어 잡지에서!
Commented by 다녀온 2人 at 2009/12/28 03:58
어제 언니네 이발관 공연 보고 와서 관련 검색하다가
우연히 김작가님 블로그 발견했네요.
저도 실은 올해 글래스톤베리 다녀왔는데
혹시 김작가님 John Peel Tent에서 Ladyhawke 공연 보지 않으셨나요?
아님 말고;; 걍 김작가님 또래 한국 남자분 2명이 바로 앞에 있는 걸 본터라.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9/12/28 11:28
헐 맞습니다.
Commented by 다녀온 2人 at 2009/12/28 17:18
헐 진짜 맞군요;;
두분이 낚시의자 같은 데 앉아계셔서 좀 부러웠던 기억이..
텐트 바깥쪽에서요. 그때 바닥이 진창이라 그냥 앉을 수 없었잖아요.
한분은 매우 비싼 dslr에 매우 비싼 렌즈를 끼고 계셨던 것 같고.
암튼 세상 좁네요 앞으로 자주 놀러올께요 ㅋ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9/12/28 19:31
낚시의자 그거 현지에서 5파운드 밖에 안했는데 사셨으면 좋았을텐데요.ㅎ 그 카메라 들고 있던 사람이 접니다. 세상 정말 좁군요. 글래스톤베리에서의 목격담을 듣다니.
Commented by goho at 2010/02/16 22:54
조심히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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