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1


20킬로가 좀 넘는 트렁크를 끌고 공항버스를 타러 성산대교 위에 올랐다. 비행기 시간은 8시 반. 2시간 정도 남았으니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너무 일찍 가서 지루해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데 택시 몇 대가 섰다. 공항가세요? 네. 2만원에 갈께요. 됐습니다. 그렇게 몇 대의 택시를 보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또 택시 한 대가 섰다. 공항 가세요? 네. 운전석 문이 열렸다. 버스비만 받고 갈께요. 정말요? 산신령처럼 생긴 택시 기사가 다짜고짜 뒷문을 열더니 내 트렁크를 실었다. 앞자리에 앉았다. 차 내부는 산신령의 방 같았다. 운전석옆에 거대한 나무 박스가 있고 운전대 앞에는 인조 소나무가 장식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싸게 가자고 한 것일까. 뒷자리에 앉은 사람 때문이었다. 한 외국인이 밤새 술을 마시고 귀국하는 듯 약간 붉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강변북로에 진입했을 때 즈음, 외국인이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 그래 오케이 피워 피워. 그는 나에게도 피우겠냐며 말보로 라이트 한 대를 내물었다. 연기 한 모금을 내뿜은 후 물었다. 어디로 가니? 아일랜드. 정말? 나도 아일랜드로 가. 파리를 거쳐서 영국을 좀 돌다가 아일랜드로 넘어갈거야. 와우, 멋진데. 난 더블린 살아. 그냥 여행가는거야? 아니, 영국의 음악적 도시를 돌면서 그 동네의 음악에 대한 책을 쓰려고. U2, 크랜베리스, 프레임스 같은 아일랜드 뮤지션들 좋아해서 더블린도 일정에 있는거야. 좋은 여행이네. 혹시 팬 있어?  이름을 팀이라고 밝힌 그는 노트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더니 더블린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프레임스, 그러니까 <원스>의 글렌 한사드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펍에 데려가겠다며. "운이 좋으면 글렌 한사드를 만날 수 있을거야."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좋은 시작이었다. 늘 마감하다가 출국 직전에야 후다닥 짐을 싸고 5만원짜리 총알 택시를 타고 후다닥 공항으로 가곤 하던 기존의 여행에 비하면 압도적일만큼 좋은 시작이었다. 심지어 출발할 때 친구를 사귀게 되다니, 그것도 동양남자 주제에.

입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어가 담배를 네 보루 샀다. 파리는 한 보루 밖에 반입이 안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긴 비행의 시작. 오사카를 경유해서 한 시간 반동안 스테이. 그리고 에어 프랑스로 갈아타고 다시 열두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잤다. 전날 밤을 새고 온 게 과연 다행이었다.자고 먹고 깨고를 반복했다. 내내 걱정이 됐다. 마젤란이 신대륙 탐사에 나서기 전날 100년만의 대해일이 바다에 몰아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다면 이런 심정이겠지, 하는 생각은 비행기안에서도 거둬지지 않았다. 뭔가 파리지엔의 전형처럼 보이는, 엘레강스하고 고져스하며 시크한 스튜디어스 언니의 엘레강스하고 고져스하며 시크한 미소를 봐도 설레기는 커녕 아, 저런 언니들과 불어로 말 한 마디 못나눈다니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이냐. 뭐, 그랬다.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을 때 비행기는 드디어 구름 아래로 내려왔다. 창문을 열어놓기 무서운 햇볕도 조금 누그러졌다. 공항 근처에 끊임없이 펼쳐진 정체불명의 밭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쿠쿵, 비행기는 무거운 몸을 활주로에 내려놓았다. 어디서 들은 얘기는 있어가지고 짐을 모조리 의자위에 내려 놓은 후 문이 열리자 마자 잽싸게 빠져 나갔다. 샤를 드골 국제 공항. 드디어 빠리에 온 것이다. 그 동안 가본 어떤 나라보다 간단하기 짝이 없어서 면세 범위를 허용한 네 보루의 담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초조했던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얼굴도 보지 않고 도장 쾅. 형식적인 세관조사도 없고, 검역절차도 없이 그냥 쾅. 그 도장도 심지어, 캄보디아 국경에서 찍어주는 도장보다 심플했다. 뭐야 이거, 이 것이야말로 똘레랑스? 아무나 환영한다 뭐 그런건가?

일반적인 여행이라면 바로 공항을 빠져 나와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1시간 반 후에 도착하는 갤럭시 익스프레스 일행을 기다려야했기 때문이다. 입국 게이트 근처의 문밖으로 나가 마일드 세븐 한 대를 피워물었다. 열두시간 넘게 금연한 게 언제였던가. 한 번도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좋았다. 이번 여행을 기회로 담배를 끊어볼까, 하는 생각은 연기에 실려 파리의 하늘로 흩어지고 말았다. 두 대 째에 불을 붙였다. 핑, 돌지 않았다. 흡연은 순식간에 습관으로 원위치. 금연이 아니라 여행 기간 동안의 효과적 담배 계획을 수립해야했다. 하루에 딱 한 보루. 더 이상은 안된다.

사방에서 온통 비음이 날아다녔다. 한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ㅅ]과 [ㅎ]사이의 무수한 비음들이었다.평소에는 신경쓰지 않던, 배경의 언어들이 이렇게 귓가를 매만진 적은 없었다. 일본과 홍콩, 중국에서는 눈앞에 익숙한 외모의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남아에서는 무수한 나라들의 언어들이 엉켜 하나의 꼴을 갖지 못하고 분산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발과 흰 피부라는 시각적 질서와 비음이라는 청각적 질서가 내 앞에 펼쳐지자 비로소 여기가 프랑스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이 에어로 하여금 'Alone In Tokyo'를 만들게 했을테고 소피아 코폴라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찍은 원동력이었겠지.

7시반 쯤,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덜컹 덜컹 덜컹. 문이 열릴 때 마다 휙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누군가와 안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보던 그 장면. 인천 공항에서는 보기 힘든 그 장면. 그리고 갤럭시 익스프레스 도착. 전날 밤 동네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 쳤을 때 "내일 프랑스에서 보자"라고 농담처럼 얘기했던 게 현실이 됐다. 지도를 보니 샤를 드골 공항은 파리에서 동북쪽에, 우리가 머물 이시레물레는 파리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다. 이시레물레시 관계자들이 마련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로 질러 이시레물레로 향했다. 첫 인상은....도쿄같았다. 도쿄 시내 말고 주택가.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리뉴얼되면서 유럽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리라. 에라 이런, 코끼리 다리는 커녕 발톱만 만지고 코끼리를 말하려 했다는 게 다음날 밝혀질 거면서 참...

시 관계자들이 준비한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이라고 해서 뭐 봉쥬르 무슈 어쩌고 하면서 돈페리뇽 샴페인 잔을 부딪히고 그런건 아니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회식같은 느낌이랄까.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지극히 가난한 여행이 될 나에게는 이 자리에야말로 최초이자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터. 비장한 마음으로 정통 프렌치를 마구 먹어주겠다고 다짐했다.

하여...

이런 레스토랑에서
연어를 다져서 요리한 음식과
닭고기를 이렇게 요리한 음식.
그리고 디저트


맛이 어땠냐고?
죽였다. 이게 바로 본토의 프렌치구나 싶은 맛이었다. 웰컴 투 파리라고 프랑스가 힘주어 외치는듯한 맛이었다. 파리를 갑자기 일정에 추가하길 잘했어 흑흑. 내 돈으로 먹었으면 꿈꿀 수도 없는 가격의 요리를 잘도 먹은 후 숙소로 들어왔다. 밤 열시 반이 되도 해가 지지 않던 하늘이 열한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밤이라 할 수 있을만큼 어두워졌다.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했고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갤럭시의 이주현은 참 잘 잤다. 로밍 자동 안내 방송을 해오지 않아 미친듯이 울려대는 리규영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대는 데도. 그 소리에 괴로워하는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데도. 파리에서의 첫날, 아직 파리를 만나지 못한 첫 날 밤이 동트기 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by 김작가 | 2009/06/20 20:42 | 아주 특별한 여름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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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ighenough at 2009/06/20 22:10
우와.. 읽는 내내.. 그냥 부럽단 생각뿐이네요.. ;ㅁ;
Commented by 細流 at 2009/06/21 00:06
앗, 맞아요. 파리가 정말 해가 늦게 지죠..;; 첫날 시차적응 힘드셨겠어요 진짜ㅠ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항 가시는 길부터 친구 사귀신 거 축하드려요+_+
Commented by Leedo at 2009/06/21 01:52
진짜 와방 부럽십니다..ㅋ
Commented by 물빛도시 at 2009/06/21 08:25
아...부럽습니다..진정....ㅠ-ㅠ
계속 좋은 여행기 올려주세요!! 기대할께요!!
Commented by 사랑이 at 2009/06/21 23:18
아~ 가고싶네요 파리.. 거지네 개마저 사랑스러운 ㅋ
Commented by with, u&me at 2009/06/21 23:56
멋진 여행이 되시길..
Commented by 릴리스 at 2009/06/22 01:49
이 나라 살면서 음식점 저렇게 현대적인 곳 처음 봤어요 +_+
여름에는 북쪽으로 갈 수록 해가 늦게 진다더라구요. 빠리 시내 관광 했으려나? 담에 여행오면 다른 지방들로 돌아요~ 프랑스는 빠리도 좋긴 하지만 여타 지방들을 더 추천하는 바입니다 흐흐
즐거운 여행하세용~

ps 다음숙소 마땅한 곳이 생긴게 아니면 제가 알려준 곳 후딱 예약하시길 바래요.. 당일날 방잡기가 힘들어서요 여기 호텔들 ==;;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06/22 16:40
'하루에 딱 한 갑 '아닌가요? ^^
'하루에 한 보루'면 여행 시작도 전에 절딴 날 수가...;;
건강히 즐거운 여행 되시길~
Commented by ambient at 2009/06/25 22:23
Friendly Fires의 Paris가 연상됩니다. 부럽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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