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버클리 <Grace Around The World>



기술의 발전은 음악 팬들을 행복하게 해왔다.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더 좋은 소리를 우리에게 듣게 해줬다. 영상 테크놀로지가 발달할 수록, 우리는 '그 때 그 곳'을 '지금 이 곳'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 녹음과 영상이 결합한 공연 실황은 기술 발전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영역이다. 덕분에 우리는 5.1채널 사운드에 HD영상으로 그 때 그 곳을 더욱 생생하게 지금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그 때 그 곳이, 이식될 준비를 채 하지 못했던 상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일지라도 한계가 있다. 제프 버클리 역시 그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아니, 미처 남기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대의 섹시 아이콘이자 록 스타가 될 수도 있었던 그는, 채 그 자리에 발을 딛기도 전에 멤피스의 울프 강에 휩쓸려 사라졌기 때문이다. <Grace>가 발매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목소리만이 세상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끝나지 않을 여행의 길을 잿빛 먼지처럼 흩날리며. 

<Grace>는 시대의 트렌드에서 비껴 나있는 작품이었다. 그 해 4월,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록의 제단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후 얼터너티브는 90년대와 등치를 이루는 단어가 되버렸다. 하지만 <Grace>는 그런지, 네오 펑크, 컬리지 록, 인더스트리얼 등 마치 기다렸다는 듯 90년대를 휩쓸며 등장한 그 어떤 장르안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월이 바뀌거나 말거나 무난한 곳에서 무난하게 머물러있는 이지 리스닝 또한 아니었다. 진공 청소기로 카페트를 밀며 'Lilac Wine' 같은 노래를 누가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팝도 록도,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하는 수많은 범주로도 묶을 수 없는 요상한 앨범이 바로 <Grace>였다. 그러나 요상한 음악이었다. 음악을 들은 누구나 취향을 뛰어넘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으되, 어디에나 들어맞는 음악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의 목소리와 그의 멜로디가 필요한 바로 그 곳이라면 어디에나. 그렇지 않다면, 'Halleluja'가 미국 드라마에 그리 자주 등장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 때 마다 차트에 제프 버클리의 이름이 등장하곤 하는 일도 없으리라.

그의 목소리를 이토록 신묘하게 만든 건 무명 시절의 환경 덕이었다. 팀 버클리라는 걸출한 아티스트의 2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로부터는 어떤 영향도 받지 못했던 제프 버클리였지만 어쨌든 뮤지션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는 어린 제프가 음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생활을 통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 장난감은 음악이었고 그의 첫 취미도 음악이었다. 뮤지션이 되는 건 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기타 한 대 들고 뉴욕으로 건너가 뮤지션이 됐다. 클럽도 아닌 카페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카페란 음악을 듣기 위해 오는 공간이 아니다. 하물며 길 모퉁이 마다 거리의 악사들이 있고 오래된 클럽이 사라져도 눈 깜짝하지 않는 뉴욕의 카페다. 누가 연주를 하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온갖 기계들은 각자의 기능에 충실하며 온갖 소음을 낸다. 제프 버클리는 그곳을 장악해야 했다. 기계의 소음을 덮어야 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음악에 귀기울이게 해야 했다. "공간 안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게 됐다.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음악을 맞췄던 거다. 사람들이 떠들면 그저 떠들도록 나뒀다. 사람들도 음악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카페의 식기 세척기가 내는 소음도 배웠다. B단조로 연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식기 세척기 소음 때문에 사운드를 낼 수 없었다." 신에, 페즈 등의 카페에서 공연하던 제프 버클리는 그렇게 공간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대화를 장악할 수 있었다. 소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블랙홀 처럼 빨아들여 성대로 토해 내는, 화이트홀 같은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 목소리가 <Grace>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Grace>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앨범을 내고 계속 노래했다. 그러나 판매고는 100만장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히트 싱글이 없었다. 이 앨범에서 커팅된 싱글은 <Last Goodbye>가 유일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Mojo Pin'부터 'Dream Brother'에 이르기 까지 어느 하나 쉬이 흘려 들을 수 있는 곡이 없는 앨범인데 정작 히트 싱글은 없다니. 아이러니한 건 바로 여기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DVD의 출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 유럽과 일본을 돌며 투어를 했고 그 때 마다 방송에 출연해서 라이브와 다름없는 공연을 펼쳤다. 히트 싱글이 없다는 건 그에게 하나의 자유였다. 원하는 어떤 앨범 수록곡이든 원하는 스타일로 노래할 수 있는 자유. 제프 버클리와 그의 밴드는 <Grace>에 있는 노래들을 앨범의 오리지널리티에 크게  제프 버클리는 방송에서 아무 노래나 하면 됐다. 만약 그의 노래 중 어느 한 곡이라도 히트 싱글로 기록됐다면, 남아있는 방송 영상은 그 노래에 편중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앨범 수록곡 대부분이 영상으로 남아있게 됐다. 
 
제프 버클리는 앨범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앨범은 특정한 순간을 담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없이 많은 테이크 중 베스트를 모아서 하나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편집과 보정이라는 단계가 들어간다. 즉, 레코딩은 아티스트의 진정성 그 자체를 보여주기 보다는 가공된 진정성을 담아내는 조작의 미디어에 가깝다. 문명에 의해 창조된 진정성은 자신의 존재를 역전시킨다. 그 스스로 재현의 대상이 된다. 아티스트는 앨범을 내고 그 앨범에 담긴 음원을 무대를 통해 재현한다. 공연을 복제하기 위해 탄생한 레코딩이란 기술이 공연이 복제해야할 대상이 된거다. 그러나 제프 버클리는 자신의 공연을 통해 앨범을 복제하려하지 않았다. 그는 <Grace>에 담긴 노래를 연주하고 부를 때 마다, 앨범 버전과는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표출했다. 라이브를 위한 편곡이라기 보다는, 그 때 그 때 자신의 기분과 영감에 따라 즉흥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하곤 했다. "언어는 아름답지만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언어란 아주 남성적이에요. 너무 구조화돼 있죠. 하지만 목소리란 내세에서 온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상징하지 않는 어둠이죠. 자신의 내부에서 나와 그 자체로 존재하고 표현되는 겁니다." 제프 버클리가 무대에서 표현하려 한 건 기계와 뮤직 비즈니스의 언어로 구체화된 '음원'의 모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서있는 그 곳의 공기와 분위기,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현되어 흩뿌려지는 목소리로 그 공간과 하나가 되려했다. 그가 무명시절에 터득했던 음악의 진리를, 짧은 프로 뮤지션 생활 내내 표출했던 거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가 남긴 음악이 요절이라는 최고의 마케팅 포인트를 넘어 계속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같은 영화를 서너번씩 보기는 힘들어도 같은 음악을 수십번씩 들을 수 있는 건 음악이 영화, 즉 서사 매체에 비해 훨씬 감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성에 의해 판독된 서사는 논리가 되어 뇌속에 저장된다. 다음에 무엇이 나오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감성은 그 때 그 때의 수용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뇌에 반영된다. 대중음악이란 감성과 이성의 조화다. 상업적인 목적이 뚜렷한 음악일 수록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듣는 이를 심리적, 생리적으로 쉽게 자극할 수 있는 공식들이 적용된다. 익숙한 멜로디와 정서를 가진 음악이 쉽게 히트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제프 버클리의 음악은 보다 감성적인 측면에 맞닿아있다. 이론과 논리로 쉽게 분석하기 어려운 기묘한 아우라가 그의 목소리와 외침과 속삭임에 깃들어 있다. 90년대에 쏟아져나왔던 그 많은 명반들 중 언제나 새로운 기분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얼핏 불가해하고 신비하며, 단순히 애수나 멜랑콜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레이스의 장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 또한 언어와 목소리에 대한 그의 철학이 음악으로 구체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제프 버클리는 음악의 원초적 목적을 가장 현대적으로 재현한 인물이기도 했다. 태초의 음악은 '절대성'에 대한 경배에서 시작했다. 원시 시대, 보름달이 뜨는 밤 나무 토막을 두드리며 군무를 추던 부족들은 음악을 통해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다. 음악은 생명과 생존을 주관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로의 가교였던 셈이다. 이런 정신은 바로크 시대의 종교 음악가들이 교부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냈던 수많은 고음악에도 전승됐다. 기독교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봉건 공동체의 정신적 안정과 합일을 이끌었던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성의 권위를 보다 쉽게 인지시키고 그 숭고미를 일깨웠던 건 복잡한 교리와 철학보다는 음악이기도 했다. 세속성이라고 하는 순간의 시간을 넘어 영성이라고 하는 항구적 시간을,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제프 버클리는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음악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켰다"라는 크리스 코넬의 말은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어떤 절대적 영감을 포착할 수 있었던, 그리고 이를 훼손하지 않고 원초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제프 버클리의 특별한 재능에 대한 고해성사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총(grace)을 절대자와 나 사이에 이뤄지는 교감에 대한 특별한 감사의 순간이라고 말해보자.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느끼는 수많은 회한과 상상, 얻게되는 무수한 영감과 감흥이야말로 은총이라 할 수 있지 않을런지.

그러니, 제프 버클리의 음악을 가장 제대로 감상하는 건 역시 그의 라이브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고 없는 그가 울프강에서 젖은 몸을 털어내며 걸어나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Grace Around The World>는 그런 불가능한 꿈을 실현해주는 문명의 선물이다. 그가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을 돌며 매개했던 은총의 시간을 담고 있다. <Grace>투어 기간 동안 출연했던 방송 중에서 그의 음악적 영감이 가장 빛나던 순간들을 모았다. 제프 버클리의 어머니인 메리 길버트가 방대한 영상자료 중 DVD에 담길 소스들을 골랐다. 라이브 영상에서 흔히 기대하는 건 뮤지션의 생생한, 즉 가공되지 않은 연주와 노래가 하나일테고 또 관객과의 호흡이 또 하나일 것이다. 이 DVD에는 그러나 후자의 기대가 빠져있다. 노래가 끝나고나서야 관객들은 뜨거운 호응을 보낸다. 어떤 노래는 그마저도 편집되어 있다. 아직 절대적 팬덤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그였기에 싱얼롱을 기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가 계속 음악 활동을 했고 스타덤에 올랐을지라도 마찬가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는 함부로 따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싱얼롱의 순간을 만들어내며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아니다. 이 DVD만 봐도 명확해진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의 설교를 청중이 함께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 진솔한 그의 표정과 신앙간증을 하는 듯 절절한 그의 목소리를 다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소름돋는 순간을 동시에 느낄 뿐이다. 무지로부터의, 혹은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소리에 침 삼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침묵이 형성되는 것이다. 비록 방송 영상을 모아놓은 탓에 라이브 DVD를 전제로 한 화려한 영상과 무대는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야 말로 어떤 블록버스터 라이브보다도 더욱 장엄하고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공연 실황 모음집을 보다가 깜짝 놀란 사실이 하나 있다. 제프 버클리의 라이브 영상이나 음원을 보고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꼭 그랬던 것 처럼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Grace>를 다시 들었다. 라이브에서도 스튜디오에서도, 제프 버클리는 한결같은 뮤지션이었다. 그에게 스튜디오와 무대라는 구분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 타자들을 합일시켰고 절대성의 음표를 뿌렸다. <Grace>와 <Grace Around The World>는 그런 사실을 서로 보여주는 쌍생아다. 달의 앞면과 뒷면이다. 순환하는 원전과 2차 사료다. 제프 버클리라고 하는 부재(不在)는 이 순환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실재가 된다. 음반 산업과 쇼 비즈니스의 틀안에서 안주할 생각이 없던 한 아티스트의 숭고한 정신이라는, 그런 실재가.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해당 앨범의 해설지.
아울러 블로그에 올린 적 없는 <Grace>의 해설지는




90년대 후반의 어느 날 밤, 브래드 피트는 그의 연인이었던 제니퍼 애니스톤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제니퍼가 CD한장을 틀었다. 쇼파에 파묻혀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브래드 피트의 귀에 한 남자의 가냘프고 부드러운 허밍이 들려왔다. '이것은 꿈에 관한 노래.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 담요는 따뜻하다. (It's a song about a dream /Well i'm lying in my bed /The blanket is warm )라는 가사를 남자가 읊조렸다. 브래드는 잡지를 놓고 제니퍼에게 물었다. "무슨 곡이야?" 제니퍼는 브래드를 쳐다봤다. 이게 누군지도 모르냐는 듯이. "제프 버클리야." 그리고 제니퍼는 자기가 이 가수를 얼마나 좋아했으며 199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브래드는 어이가 없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Mojo Pin'을 처음 들은 자신이, 심지어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익사할 때까지도 그의 노래를  몰랐다는 사실이. 브래드 피트는 그날부로 제니퍼 애니스톤 못지 않은, 제프 버클리의 열혈 팬이 되었다. 본인이 "집착에 가까웠다"고 할 정도로. 그 후 제프 버클리의 <Grace>는 이 커플의 데이트용 앨범이 됐다. 심지어 제프 버클리의 모친인 메리 길버트를 찾아가 그들의 결혼식 때 제프의 노래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브래드 피트 스스로 제프 버클리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고 직접 주연을 맡겠노라 다시 메리 여사를 찾아갔다. "나 죽은 다음에나 하슈"라는 거절을 받고 돌아와야 했지만. "그의 음악의 본질에는 무엇인가가 흐릅니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최고의 예술 작품의 본질안에 존재하는, 진실이 담긴 무엇이죠."  

브래드 피트가 생전의 제프 버클리를 몰랐던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채 100만장이 팔리지 않은, 지명도에 비해서는 너무 낮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 <Grace>니까.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듯 <Grace>의 가치는 수치로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프 버클리는 천만장의 셀링 포인트로도 해낼 수 없는 영향을 더 많은 사람에게 주지 않았던가. 그의 음악적 원류, 그 중심에 있던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마저 혼을 빼놨을 만큼. "제프 버클리의 발은 땅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저 멀리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지미 페이지) 추억은 현실을 미화시킨다. 하물며 망자에 대한 기억은 더욱 더 그렇다.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제프 버클리에 대한 뮤지션들의 회고에는 단순한 레토릭을 넘어선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다른 이들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자. "섹시함 그 자체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크리시 하인드-프리텐더스). "난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했다. 이 앨범을 발견한 게 너무나 감사하기만 했다." (스티브 바이) "제프 버클리가 'Halleluja'를 부르는 걸 듣고 있으면 자신이 초라해질 지경이다. 그 노래는 제프 자신을 굉장히 특별한 위치로 격상시킨다. 그런 노래는 흔치 않다."(더기 페인-트래비스) "제프 버클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음악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켰다. "(크리스 코넬-오디오슬레이브) "제프 버클리는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적어도 톰 요크 보다는."(매튜 벨라미-뮤즈) "어떤 사람들이 종종 우릴 비교한다. 우리가 같이 듀엣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슬퍼진다."(루퍼스 웨인라이트)" "제프는 소음으로 가득찬 바다속의 순수한 물방울이었다."(보노) 제프 버클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남긴 음악이 <Grace>다.  

아티스트의 요절이란 음악의 만신전으로 가는 입장권과 같다. 살아생전 위대했던 뮤지션은 더 위대해지고, '위대함'으로 수식하기에는 망설여졌던 뮤지션도 요절했다는 이유로 위대해지곤 하는 게 이 판의 생리다. 달래 쇼 비즈니스에서 아티스트의 죽음만큼 파괴력 있는 상품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뮤지션의 사후, 온갖 종류의 미발표작이 나오고 생전의 라이브가 등장하며 베스트 앨범이란 형식의 컴필레이션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지금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Grace>만 해도 지난 해 'Legacy Edition'이란 이름으로 리마스터된 오리지널 음반과 한 장의 미발표 트랙 모음집, 한 장의 DVD가 붙어 무려 세 장짜리 버전으로 출시되지 않았던가. 또한 제프 버클리의 이름으로 1997년 5월 29일 이후 발매된 앨범만 몇 장이던가.

그러나 그가 살아서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음악들이 하나 둘씩 공개될 때마다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미완성 상태였을 그 곡들이 제 꼴을 갖추어 세상에 등장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보다 많은 곡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더 들려지길 원한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에. 심지어 Legacy Edition에 실려있던 'Forget Her'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이 모든 사후의 선물은 말 그대로 유산이다. 제프 버클리라는 뮤지션이 생전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이자 야사(野史)인 것이다. 발매된지 11년이 지난 <Grace>를 어떤 앨범보다 많이 듣게 되는 까닭도 이 앨범이 정사이자 그가 올곧이 들려줄 수 있었던 노래기 때문이다. 한 뮤지션의 재능과 노력, 고민과 인생이 작곡단계부터 마스터링까지 고스란히 배어있는. 

 

부인하지 않겠다. <Grace>에 대한 이 너저분한 상찬은 결국 그가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가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감정의 토사물일 수도 있다. 게다가 생전의 제프 버클리는 록 스타의 요절로 만들어지는 신화를 비꼬면 비꽜지 일말의 동경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역시 스물여덟의 나이에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모든 건 결과다. 만약 그가 계속 살아서 몇 장의 앨범을 더 냈다면 과연 <Grace>가 일말의 의심도 없는 걸작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겠냐는 가정, 무의미하다. 사실 가정이 필요없던 시점인 발매 직후에도 우려와 실망을 불러일으킨 <Grace>였다. 스물두살에 어쿠스틱 기타 하나 들고 뉴욕으로 향했던 그가 정착했던 클럽, Sin-E에서의 라이브를 담은 <Live At Sin-E>를 들은 관계자들은 그가 팀 버클리와 밴 모리슨의 장점만을 갖춘 걸출한 포크 뮤지션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Grace>는 그런 예상을 깬 음악이었다. 자궁에서 갓 빠져나온 아기의 제 모습을 보기 위해선 최소 몇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였다. '기대에 벗어난' 이 앨범에 콜럼비아의 홍보 담당자들이 마케팅 포인트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럴만하다. 이런 음악의 장래란 철저하게 듣는 사람들의 몫이니까.

그러나 <Grace>가 처음 등장했을 때 관습적인 음악 듣기에 익숙해진 사람들도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음을 밝혀야겠다. 1994년 당시를 지배했던 얼터너티브의 사소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크도 아니었다. 복고적인 록이었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시대와 동떨어져있고 흐름에 신경쓰지 않는 순례자같은 음악이었던 것이다. 시험 범위 밖에서 난데없이 출제된 응용문제 같았다. 게다가 앨범 타이틀은 '은총'이고 눈에 딱 들어오는 노래는 '영생'(Eternal Life)이요, '할렐루야'라니. 가사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서야 CCM으로 오해하기 딱 좋다. 무엇보다 팀 버클리의 아들이다. 생긴 것도 아버지랑 똑같이 생겼다. 존 레넌의 외모와 목소리만 닮은, 줄리안 레논 못지 않다. 이래서야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등장한 그저 그런 2세 음악인 취급을 받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 마음을 다져 잡고 음악을 듣는다. 그때부터다. 얼터너티브도, 은총이니 영생이니 하는 성경에나 나올법한 말들도, 팀 버클리도 집어 치워라. 그냥 음악이다. 몇 곡의 싱글이 전면에 나서 있고 다른 곡들이 뒤를 받치는 평범한 앨범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10곡의 음악이 모두 색깔과, 감정과, 생명을 갖고 있는 앨범이다. 단지 훌륭한 곡과 그 보다 더 훌륭한 곡이 담겨있을 뿐이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훌륭함이 여기에 있다.  'Halleluja'에 먼저 경도되고 마지막에 'Eternal Life'에 격정을 느끼느냐, 'Lilac Wine'으로 시작해 'Grace'를 가장 자주 듣게 되느냐. 아니면 'Mojo Pin'부터 'Dream Brother'까지 차례로 감동 받아 가느냐. 이런 사소한 차이의 순열조합이 있다. 그리고 이 순열조합의 끝에는 결국 <Grace>라는 앨범이 빛난다. 3면체 큐빅을 어떻게 뒤섞든 그것이 큐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 모든 노래가 이 앨범으로 통한다.

록의 열정과 포크의 소박함, 가스펠의 성령과 보컬 팝의 흡입력이 화학적으로 결합해서 이어진다. 상처입은 동물처럼 울부짖고 꿈꾸는 나르시스트처럼 흐느적대는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가 매개체가 된다. "언어는 아름답지만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언어란 아주 남성적이에요. 너무 구조화돼 있죠. 하지만 목소리란 내세에서 온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상징하지 않는 어둠이죠. 자신의 내부에서 나와 그 자체로 존재하고 표현되는 겁니다."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는 그래서 담겨있는 언어를 궁금하게 만든다. 가사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음악을 만나는 건 생각처럼 흔한 경험은 아니다. 언어를 지배하는 목소리기에 'Halleluja'나 'Lilac Wine'같은 리메이크 곡들도 원곡처럼 들리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성으로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직 감성을 믿고, 음악에 육체와 영혼을 맡긴 사람만이 가능한 경지다.

전설적 포크 가수의 피를 물려받고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그녀의 애인을 통해 레드 제플린을 알게 됐고 본질의 희노애락으로 충만한 노래를 불렀던 한 남자는 가기 전, 굵직한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음악이 곧 은총이라는. 너무나 교과서적이어서 자칫 하면 홍보 문구밖에 되지 않을 메시지다. 하지만 '자칫'이 없다. 당신이 접하고 있는 이 음악은 분명히 장르와 트렌드, 산업과 기술을 초월한 음악이 주는 은총이다. 누군가 음악을 왜 듣느냐고 묻는다면, 대답대신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90년대의 아이'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생전에 이미 압도하기에 충분한 수의 팬이 그를 따랐다.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록 스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무엇이 부족한가. 당대 뮤지션들의 입에 침을 튀기게 하는 재능, 충분히 매력적인 출생 성분, 게다가 더없이 잘생긴 얼굴까지.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인터뷰를 뒤져봐도 그는 그런 화려한 생활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90년대의 아이콘들과 제프에게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어쨌든 <Grace>로 스타가 된 제프 버클리는 자유로이 공연하던 뉴욕의 클럽 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는 종종 예고없이 클럽으로 향했고 불시에 노래했다. 운좋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리며 노래를 들려주는 게 제프의 큰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런 기쁨이 그의 창작 노트에 계속해서 내면의 언어들을 기록해 나가게 했던 힘이었다.

그는 다시 빼곡이 들어 찬 창작 노트를 들고 멤피스로 향했다. 후일 <Sketches (For My Sweetheart the Drunk)>라는 제목으로 발매될 두 번째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 곡 작업이 끝났다. 그는 밴드의 멤버들을 멤피스로 불렀다. 멤버들이 비행기를 타고 멤피스로 오고 있을 때, 제프는 로디였던 키스 포티와 함께 홀가분한 기분으로 작업실 근처의 울프 강으로 향했다. 그는 몸을 좀 식히고 싶다며 키스에게 입을 맞춘 후 물속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그저 사랑이라고. 어떤 것도 그보다 중요하진 않아. 사랑, 사랑, 사랑 말이지" 뒤이어 레드 제플린의 'Whole Lotta Love'를 부르던 제프의 곁을 비행기 한 대가 낮게 스쳐지나갔다. 비행기가 사라진 후 빠른 물살을 따라 헤엄치던 제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5일 뒤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발견될 때까지.

네 번의 사랑이 그의 말줄임표같은 유언이 됐다. 농담같은 언어로 가득 찬 세상에 농담같은 진담, 혹은 진담같은 농담을 남겨놓고 그는 떠났다. 불가사의한 사랑이었다.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위대하다고,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가. 그게 제프 버클리의 음악이었다. 너무 많은 미인들의 생명을 빨아먹으며 번창했던 90년대가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훌륭했으되 그에 못지 않게 비극적인 선물이었다. 아름다웠으나 가슴아팠던 그 10년도 한참 지나가 버린 지금, 제프 버클리의 <Grace>는 90년대의 박물관에 살아있는 박제가 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품은 결코 세월의 때에 찌들지 않을 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가슴 아픈것이리라. 마지막으로 가리킨 시간과 함께 멈춰 선 시계를 보는 듯.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by 김작가 | 2009/06/03 18:44 | 스토리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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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oowon at 2009/06/03 21:58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콩딸라 at 2009/06/04 01:12
오늘 좋은 앨범, 좋은 뮤지션을 알게 되네요.
잘 읽었고 동시에 잘 들었습니다.
Commented by bliss at 2009/06/04 10:59
세상이 흉흉하여, 사는 게 뭔지 음반 나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글 보고 바로 샀어요. 소장중인 디비디나 씨디 중 김작가님 쓰신 속지가 꽤 보여요. ^^; 앞으로도 좋은 음악 많이 소개해주세요.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06/04 17:35
이번에는 꼭 질러야지 다짐하게 되네요.
Commented by lennystyle at 2009/06/12 13:45
어젯밤 문득.grace15주년이라 검색했더니!! 이건 메리여사가 참여한 기념앨범이 나왔다니 ~_~ 아마존에서 2dvd제품을 구매하고 기다릴수없어 한국발매반을 또 주문했는데....검색하다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단순한 리스너매니아가 쓴것 같지않았는데. "김작가"님의 블로그군요.이번글도 쓰셨던건가 보네요. 앞으로 종종 들리겠습니다. 미드프라이스로 나온 grace는 벌써 친구들에서 20장도 넘게 사줬는데.그 작가님의 블로그라니;;;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at 2009/06/12 18: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odoc at 2009/06/19 20:17
잘 읽고 갑니다. 읽으면서 '리뷰나 팬심치곤 엄청 전문적이다' 싶었는데
이 블로그였네요.
Commented by 까칠모드☆동산 at 2009/06/23 12:04
음악찾고 있다가 잘 읽고 가요 !
Commented by lennystyle at 2009/06/24 12:50
올려놓으신 저 사진들은. 음반사의 프로모자료에 있는건가요?
어메이징그레이스가 합본되어있는 걸 구입했는데. 전 다른 사진엽서들이 들어있어서요.
Commented by 수민 at 2009/09/26 12:25
이 글을 http://cafe.naver.com/westwoodman.cafe 에 퍼가겠습니다. 출처는 정확히 밝히겠구요. 혹시나 문제가 되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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