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다짐
갑자기
음악과 생활 블로그가 아니라
오디오와 생활 블로그가 되가는
그런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바야흐로
일생 처음으로 나만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가는 시기인 것이다.
이 파멸의 불지옥을 뚫고 나가기란 상당히 어려워서
지름의 악마로부터 영혼을 지켜내느라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통장이 빛의 속도로 엔꼬로 달려 가고 있다

책상 앞에 써붙여 놓고 싶은 심정이다.

하여튼
어제 고민하던 앰프 중 결국 엣지와 미니멀을 포기하고
지름의 악마로부터 영혼을 지켜내고야 말았다.
대가는 달콤하지 않았다.

지름의 악마는 가까운 용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나
번뇌의 열매는 용인으로의 길을 뚫고 가야만 했다.

애시당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작정이었으나
(그까짓 용인)
출발 직전
마음으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야성의 직감이었다.
지하철+버스 크리=좃
그런 외침이었다.

아뿔싸.
(그까짓 용인)
이 아닌 것이다.
(무려 용인)
이랄까.
초딩때 에버랜드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 용인.

판매하시는 분의 집을 어떻게 찾아갈 것이며
앰프의 무게를 채 알지 못하는 데
어찌 들고 올 것이냐는
존재론적 문제로 인하여
전화를 돌렸다.

수원으로 드라이브나 갈까?
미안. 몸이 안 좋아서.
수원으로 드라이브나 갈까?
내일 가면 안될까?
수원으로 드라이브나 갈까?
틱.

그러나 귀인은 자고로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나타나는 법.
한 때 한 솥 밥을 먹었으며
한국 스노우보드계에 큰 족적을 남긴 후
과감히 음악의 길을 선택
현재는 거의 '호문쿨루스'의 주인공 사내처럼
차에서 생활하기 직전에 처해있는
K가 남가좌동에서 나타난 것이다.

전에는 몰랐는데
K의 인생관은
무서울만큼
나와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다. 어떻게든 되는 것이다.
초행길의 용인을
우리는 돌고 돌아
도착하고야 말았다.
네비게이션도 없이 가고야 말았다.
인생은 원래
어떻게든 되는 것임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확인하고 말았다.
유턴을 열번쯤 하고
5분이면 갈 길을 20분 쯤 돌아 가고야 말았다.
어쨌든
어떻게든 된 것이다.

그렇게
어떻게든 되어
어쨌든 판매하시는 분의 집에 도착.
뭐랄까, 딱 봐도 귀티가 잘잘 흐르는
하여 품행이 썩 불량한 두 사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나와 동갑의
그 분께서는
상당히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집에 있던
벡의 <Mellow Gold>를 들어보고
냉큼 집어왔다.

수원역으로 향했다.
스피커밑에 결착할
스파이크를 사기 위해서다.

장터에 올린 게시물을 보아 뭔가 야로의 향기가 살짝 풍겼지만
택배도 아니고 직거랜데
별 일은 없겠지
라는 마음으로 수원역에서 접선을 하기로 했다.
우리 차의 옆에 그의 차가 주차했다.
창문이 열렸다.

음, 뭔가 야로의 향기가 더욱 강렬해지는 군.
품행이 불량한 우리 둘과는
자못 대조되는
뭔가 어둠의 냄새가 살짝 피어오르는
덩치큰 선글라스 사내는
마치 마약이라도 거래하듯
차창과 차창 사이로

인사를 나눈다->물건을 확인한다->돈을 건낸다->인사를 나눈다

의 순서를 밟아
선글라스를 낀 채 큰 덩치로 차를 몰아 석양속으로 사라졌다.
찬란한 금빛의 스파이크 8개와
찬란한 은빛의 앰프를 들고
서울로 왔다.

생각해보면
물건을 사러
서울 밖으로 나가기도 난생 처음이었다.
강남에서 약속이 잡혀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홍대로 끌어들이는
나의 근성을 생각하면
놀랄만큼 쉽게 허물어진건데

과연
지름의 악마로부터
영혼을 지켜내고
금빛의 스파이크와
은빛의 앰프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오디세이에 필적하는
고난과 모험이 필요함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작업실에다 물건을 고히 모셔둔 후
역시 좀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
임산부와의 저녁
이라는 미션을 수행한 후
다시
작업실.

옷따위 싱크대에 처박아주마, 라는 기세로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고
청소따위 평생 하지 않아주마, 라는 기세로
사방에 포장과 비닐을 내던진 후

앰프를 세팅하고
스파이크를 세웠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쓸 날이
올 거라고는
평생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쓰게 되었다.

스피커에 스파이크를 달지 않고 뮤직 피델리티로 들었을 때 청음 위치에 따라 생기던 부밍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음장감과 해상도는 더욱 상승했으며 다소 불만스러웠던 저역도 단단히 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뭔 소리냐.
한 달전의 나라면
절대 알아듣지 못했을 거다.
아무튼 좋아졌다는 얘기다.

좋아서 죽을 뻔했다.
지름의 악마로부터 영혼을 지켜낸 게.
고난과 모험 끝에 이 소리를 얻어낸 게.
괴로워서 죽을 뻔했다.
다음 단계로 필요한 아이템
그러니까 케이블과 멀티탭, 포노앰프 중
혹시라도 장터에 싸게 나온 게 있나를
살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러나 어쨌든
통장은 외치고 있다.
잔고가 빛의 속도로 엔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나에게는 자비가 있다.
그 고단한 사정을 감안하여
케이블 구입은 천천히 해주기로 했다.
아니아니, 케이블은 중요하니까 먼저 해주고...
혹시라도 포노 앰프가 싸게 뜨면 살짝 질러주고..
그래그래, 멀티탭은 뭐 사정이 좀 괜찮아지면...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라고 천장을 우러르는
새벽의 다짐이다.





by 김작가 | 2009/04/07 04:38 | 상수일지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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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오반 at 2009/04/07 04:45
스텔로, 예쁘네요. 크릭은 헤드폰단이 괜찮다던데.
오디오 제품 박스 개봉할 때의 그 심정이란.
Commented at 2009/04/07 10: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ilver at 2009/04/07 11:39
전국을 도셨군요 'ㅅ'?
Commented by 태엽이 at 2009/04/07 15:21
ㅋㅋㅋ... 전 그냥 글라스 광케이블만 사면 됩니다.. '듣는'쪽이 아니라서 천만 다행...
Commented by ^^ at 2009/04/07 15:53
ㅋㅋㅋ 정말 오디오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너무 가시진 마세요.
돌아오기 힘들어요.-_-
Commented by joydvzon at 2009/04/07 16:36
니가 드디어 오디오질을 시작했구나........
말년에 모은 오디오로 친구와 와인바를 내는 건 좋지만 심장병은 걸리지 마라.......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9/04/07 17:03
그 분께서는 그 쪽 세계에서 거의 오디오에 기를 불어넣어 음질을 개선하는 신공의 소유자로 통하시던데...
Commented by 공감백퍼 at 2009/04/07 23:06
딱 거기까지
Commented by 선혜 at 2009/04/15 22:49
오빠땜에 나 진짜 스피커 케이블 청소도 하고 전선 피복도 벗기고 접지도 하려고 기웃대고 있음-_- 케이블도 주문 직전. 나까지 말렸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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