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니 선 <Origin>


신예들이 새 시대를 열고자 각축전을 벌일 때 선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은 묵직한 존재 증명일 것이다. 레이니 선의 네번째 앨범 <Origin>은 그런 위업을 달성하고도 남는다. 부산 출신으로 인디 1세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악을 들려줬던 그들은 참으로 멀고 험한 길을 돌아와야했다. '귀곡 메탈'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데뷔 앨범으로 그들은 부산 씬의 스타에서 단숨에 중원으로 치고 올라왔다. 펑크와 얼터너티브가 득세하던 그 시절, 레이니 썬은 마초적이지 않은 어둠과 패배적이지 않은 처연을 깊고 깊은 곳에서 뽑아올리는 단 하나의 팀이었다. 당시 이들의 공연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에 열광하고 그 속에 감춰진 몽환에 빠져들며 자연스레 입소문을 퍼뜨릴 수밖에 없었다. 

여세를 몰아 그 길을 오롯이 걸어갈 수 있었을텐데, 2001년에 발표한 <유감>은 귀곡 메탈의 외투를 단숨에 벗어버린 어쿠스틱의 바다였다. 그러나 서정이란 단어만으로는 모두 덮을 수 없는, 음산하면서도 적요한 어쿠스틱이었다. 그리고는 밴드 외적인 문제들이 시작됐다. 지리하고 흉흉하며 스스로를 능히 갉아먹고도 남을 문제들이었다. 결국 정차식과 김태진만이 남았다.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즈음, 레이니 썬은 세번째 앨범을 발매했다. 이번에는 트립합이었다. 우울함의 필터와 몽롱함의 거름종이를 통과한 각종 음향 효과가 물속에서 춤 추는 잉크 방울처럼 흐드러졌다.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조용했다. 밴드는 큰 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김태진은 내귀에 도청장치에 가입했고 정차식은 독립영화음악을 만들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한 시대를 풍미할 뻔 했던,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던, 그럼에도 어둡게 빛났던 레이니 선이 그렇게 끝나나 싶었다. 오판이었다. 정차식과 김태진, 최태섭과 김태현의 오리지널 멤버들은 다시 레이니 선을 시작했고 이따금씩 공연을 가졌다. 2006년부터의 일이었다. 앨범을 기약한 건 아니었다. 그냥 밴드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밴드가 그렇듯 존재의 유지는 곧 다음 스텝을 구상하게 된다. 그들의 네번째 앨범 <Origin>은 2008년 벽두부터 기획된 앨범이었다. 예전같은 부담은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것에 충실하게, 눈치보지 않고 만들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작업도 길어졌다. 결국 앨범은 예정을 훌쩍 넘겨 해가 바뀌고 난 지금에서야 발매됐다.

어느 한 장의 앨범도 동어반복하지 않았던 그들이다. 허나, 이 앨범은 기시감을 유발한다. 1집 멤버 그대로 뭉쳐 등장한 <Origin>의 첫인상은 <Porno Virus>의 재림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반갑다. 2집과 3집이 나올 때 마다 다시 한번 <Porno Virus>스타일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Origin>은 단순한 재탕만은 아니다. 그들이 내세운 '기원'은 밴드의 명성을 만들어낸 데뷔 앨범에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니 썬은 이 앨범을 통해 밴드 결성 이후의 모든 시간을 총화하고 밴드 결성 이전의 많은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귀곡 메탈과 월드 뮤직적 어쿠스틱, 온갖 일렉트로닉 노이즈가 등장하고 고딕 오페라와 80년대 북유럽 헤비 메탈의 방법론이 동원된다. 이 앨범에서 시간은 시계바늘에서 벗어나 하나의 화폭속에서 공존한다. 처연한 서정과 극적인 암울함이 혼재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넘보기 힘든 밴드만의 독보적 아우라는 그 카오스를 관통하는 중지다. 밴드의 투톱인 정차식의 보컬과 김태진의 기타는 살모사와 코브라처럼 뒤엉켜 독기를 뿜어내고, 도끼로 장작을 패듯 높은 타점을 자랑하는 김대현의 드럼은 예리하게 음과 음을 쪼갠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와 박건, 나비효과의 김바다는 오랜 우정의 목소리를 뿌리고 크래시의 윤두병은 음울히 흐르는 광폭함에 파고를 더한다. 일찍이 인디 신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했던 음악을 들려줬던 그들은 자칫 전설이 될 뻔했던 이름을 가뿐히 지금 이 시대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달리는 후배들에게 녹슬지 않은 등근육을 수축시킨다. 공백은 길었어도 내공은 녹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어두운 하늘이 열리려 한다. 오직 레이니 선만이 몰고 올 수 있는, 여투어둔 먹구름이 그 하늘을 메운다.


by 김작가 | 2009/02/13 03:33 | 음악이 해준 말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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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이글루스 블로거들의 신.. at 2009/02/13 18:40

제목 : 레이니 선
▼ 김작가님의 포스트 중에서. 공백은 길었어도 내공은 녹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어두운 하늘이 열리려 한다. 오직 레이니 선만이 몰고 올 수 있는, 여투어둔 먹구름이 그 하늘을 메운다. ▷ 북극곰의 공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소름돋던 기억이 있지만, 솔직히 '레이니 선'이 새앨범을 발매할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한&.....more

Commented by 소마 at 2009/02/13 10:32
만세!!입니다ㅠㅠㅠㅠ
Commented by tactin99 at 2009/02/13 12:52
근데 "처연"이 무슨뜻이여요? 국어사전을 봐도 없길래
Commented by srv at 2009/02/13 19:07

이번 주말 '타'에서 노이즈가든(정확히는 - 이제 캐나다로 이민을 가신다는 - 박건+ 로다운30입니다만)의 공연에 레이니 선이 게스트로 나온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at 2009/02/18 00:48
처연하다 : 애닲고 구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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