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혁 <Vol.2>


눈덮인 설원을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한 구도자가 있는 풍경. 가쁜 숨을 몰아쉬지만 눈빛은 평온히 처연하다.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가. 그레고리안 성가, 밥 딜런의 초기곡...아니아니, 외국 말고 한국 음악으로.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여기에 한 장의 앨범을 덧붙이려 한다. 그의 두번째 앨범인 <Vol.2>다. 이장혁은 90년대 후반 아무밴드의 보컬과 기타로 음악계에 데뷔했던 뮤지션이다. '사막의 왕'같은 노래는 90년대 한국 인디 음악의 명곡이었으며 이 노래가 담겨있던 아무밴드의 유일한 앨범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걸작이었다. 1999년 이 앨범을 발매했던 레이블은 그 때 쯤 무기력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홍보도 전혀 없었고 음반 매장 한 구석에 처량히 처박혀 있었다. 금새 품절이 됐다. 인디 신의 거품도 급속히 빠지던 시기다. 아무밴드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장혁도 사라졌다. 그렇게 잊혀지는 줄만 알았다.

그가 통기타를 들고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리고 2004년, 그는 자신의 첫 앨범을 발매했다. 역시 침묵의 등장이었다. 그 흔한 앨범 발매 기념 공연 한번 없이 조용히 나온 이 앨범은, 그러나 야금야금 이름을 알렸다. 90년대를 지배했던 루저 정서가 촌스러운 것이 된 2000년대에, 그는 여전히 루저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풀어나가고 있었다. 루저인 척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와도 소통할 수 없는 낙오자의 체념과 실낱같은 분노, 미적이기까지한 자학이 그의 음악안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을 찾을 길 없는 사람들이 이장혁의 앨범에 반응했다. 음악의 유통기한이 길어야 몇 달인 유행의 시장에서, 그 시장 바깥에 있던 이 앨범은 꾸준한 선택의 되상이 됐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단종이 되었다가 최근 보다 나아진 음질로 다시 한번 재발매됐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이장혁은 두번째 앨범을 내놨다. 2008년의 막바지인 12월 26일이었다. 

구스 반 산트의 작품 몇 개를 좋아한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말이다. 각각 콤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과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순간을 다루고 있다. 이 더할나위 없이 자극적인 소재를 구스 반 산트는 한없이 담담하게 다룬다. 그 담담함과 아름다운 화면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이장혁의 이번 앨범 또한 그렇다. 온통 냉소와 허무, 체념과 좌절로 뒤범벅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어떤 슬픔도 분노도 없다. 지난 앨범을 감싸고 있었던 몸부림도 없다. 비틀고 일그러뜨릴 근육마저 사라진 것일까. 일렉트릭 기타의 사용은 최대한 자제되고 어쿠스틱 기타가 차가운 물처럼 흐르는 이 앨범은 기나긴 한숨같은 작품이다. 그의 보컬은 한 결 섬세해졌고 낮아졌다. 분노하던 루저는 체념의 구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지난 4년간 결혼도 하고 지명도도 올렸건만 그의 음악에는 여전히 한 조각의 행복도 없다. 기형도가 음악을 했더라면 꼭 이랬을 것이다. 첫 곡 '백치들'에서 '세상은 원래 그래요'라 노래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 아, 저 어린 것들에게 이런 절망의 문장을 부르게 하다니. 그런 게 이장혁 식의 위로다. 나아질 것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덜 아플 거라는.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노래한 '얼음강'은 '스무살'에서 이미 그랬듯 함께 있어도 마음이 닿지 않을 때의 소외를 이야기한다. 그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와닿는 건 우리가 바로 그렇기 때문일 거다. 이장혁은 그렇게 힘없는 자들의 내면을 말없이 응시한다. 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한 '조',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는 그런 이장혁의 세계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노래들이다. 구원을 믿지 않는, 그래서 분노도 체념도 할 필요없는 이들의 숨결이 열한 곡 내내 이어진다. 추악한 꼰대의 냉소가 아닌 처연한 아웃사이더의 한숨이 허파와 성대를 거친다. 냉기와 온기를 더한다. 유난히 놓칠 수 없는 앨범이 많았던 12월, 이장혁의 <Vol.2>는 그 행렬의 맨 뒤에 서 있는 걸작이다. 2008년 최후의 일격이다.


by 김작가 | 2008/12/31 17:33 | 음악이 해준 말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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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rifflewind's.. at 2009/01/01 23:22

제목 : 여울바람의 생각
첫 곡 '백치들'에서 '세상은 원래 그래요'라 노래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 아, 저 어린 것들에게 이런 절망의 문장을 부르게 하다니. 그런 게 이장혁 식의 위로다. 나아질 것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덜 아플 거라는. _ 김작가...more

Commented at 2008/12/31 17: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holove at 2009/02/10 11:17
감동입니다....
Commented by 라떼 at 2009/03/27 13:16
겨울의 목소리로 봄을 노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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