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25 시규어 로스 공연 후기



신기한 일이다. 분명히 기억은 하고 있다. 2008년 10월 25일 6시부터 7시를 살짝 넘길 때까지, 도쿄 신키바 스튜디오 코스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시규어 로스가 어떤 노래들을 불렀고 어떤 퍼포먼스를 펼쳤으며 어떤 리액션이 나왔는지를. 그러나 사진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흔들리거나 촛점이 나갔다. 노트의 메모들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휘갈겨져있다. 심지어 언제 썼는지 알 수 없는 문장도 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이 있었던가. 그래, 뮤즈의 펜타포트 스테이지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뮤즈의 그것이 흥분으로 인한 오르가즘이었다면, 시규어 로스의 공연은 우리를 산소의 세계에서 양수의 세계로 이끄는 듯 했다. 그들의 육성과 연주를 눈 앞에서 보고 듣는 건 실로 압도적인 영적 체험이었다.


도깨비 투어의 피로도가 최고조에 달한 탓에 잠시 붙였던 눈을 떠보니 4시 40분. 부랴부랴 씻고 호텔을 나선 후 JR로 향했다. 신주쿠 산초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거의 직감적으로 여기저기서 갈아탄 후 신키바에 도착하니 6시 10분쯤. 다리 건너 있는 스튜디오 코스트에 이르자 시계는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디오헤드 때는 일본분이 동행해서 어렵지 않게 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쩐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초대/관계자 입구로 들어가 외쳤다. "아임 김작가 프롬 코리아!" 다행히도 담당자가 명단을 미리 숙지했는지 그 자리에서 표, 라고 하기에는 뭔가 엉성한 입장권을 건네줬다. 만약 추가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면...참 난감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무사히 들어가니 로비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다행히다.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구나. 본 공연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멜론 악스보다 좀 더 큰 정도? 대략 2000명 남짓한 인원이 객석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자리를 잡으려면 공간을 파악해야하는데, 파악은 커녕 무대가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얼핏 주변을 살펴보니 2층이 있긴 했다. 플로어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은 플로어에 있어봤자 왠만해선 앞사람 뒷통수만 실컷 쳐다보다가 끝나기 십상. 올라가기로 했다. 그 와중에서도 스피커에서는 <Ágætis byrjun>의 인트로가 반복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객석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시규어 로스가 무대로 올라왔다. 첫 곡으로 연주한 노래는 ' Svefn-g-englar'. 객석에 삽시간에 침묵이 번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압도적인 집중감. 원래 도쿄에서는 다음날 도쿄 포럼에서 대형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워낙 빨리 매진된 탓에 추가로 잡힌 공연이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서 열렸고 집중력도 더욱 높을 수 밖에.


2층에 올라가 억지로 (국내에서 열린 공연이었다면 매너와 배려를 실천했겠으나 이 거 하나 보겠다고 비행기 타고 날아온 처지에 그런건 사치다.) 자리를 잡고 무대를 내려다보니 시규어 로스의 특이한 무대 배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통 보컬이 가운데에 양옆에 기타와 베이스, 뒤에 드럼이 배치되는 게 일반적인 밴드의 배치인데 반해, 이들은 네 명의 멤버가 나란히 위치해있었다. 왼쪽에서 캬르탄 스베인손이 건반 세트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 욘시가 마이크 앞에서 기타를 메고 활을 들고 보잉을 하고 있었다. 기오르크 홀름이 욘시의 옆에 서있었으며, 오리 포들 디러손이 무대의 맨 오른쪽에서 드럼을 쳤다. 그러니까, 욘시와 홀름이 앞을 보고 스베인손과 디러손이 그들을 바라보는 형태였다. 녹음기와 카메라를 꺼내고 노트를 펼쳤다. 요컨데 공연을 볼 준비가 그제서야 끝났다는 말이다. 두번째 곡은 'Glosoli'. <Heima>에서 가장 먼저 연주된 곡이다. 공연을 보기 전, 내심 기대했던 게 있다. <Heima>에서처럼 이 노래는 무대 앞에 천을 드리우고 조명을 변화시켜 그림자 놀이를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신 무대 뒤의 영상을 통해 신비한 효과를 냈다.


조명도, 영상도 일품이었다. 천장위의 거대한 미러볼에서 반사되는 조명이 시시 때때로 공연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영상은 그들의 얼굴을 비춰주는 대신 풍금의 페달을 밟는 욘시의 발, 멤버 네 명이 모두 모여 연주하는 실로폰의 위, 활로 긁히는 기타 줄 등 시선의 사각지대를 거대하게 비추며 기묘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묘하고 신비로우며 일품이었던 건 역시 그들의 음악이었다. <Með Suð Í Eyrum Við Spilum Endalaust>과 <Takk...>의 수록곡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날 공연은 왜 라디오헤드가 진작 그들을 점찍어 유럽 무대에 데뷔시켰는지, 단 한 곡도 따라 부를 수 없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왜 컬트적 팬덤이 흔들리지 않는지, 왜 워히터에서 그들을 보고 온 사람들이 라디오헤드보다 시규어 로스가 더 좋았다고 말했는지를 입증하고 또 입증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약간의 MR을 이용한 것 외에는, 모든 사운드를 네 명의 멤버가 재현하고 또 변주했다. 멘트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래들이 끊김없이 하나처럼 흘러갔다. 나와 무대의 거리는 약 30미터 정도. 그 사이에 눈가루 흩뿌리는 아득한 설원이 펼쳐진듯했다. 그 너머에서 정령들이 노래하는 듯 했다. 그들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기 전, 일체의 가치관없이 자연 그 자체를 예술로 담아내던 태고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반에 대한 글을 쓸 때 마다 들던 막연한 가정법은 그들의 공연을 보고 나니 당위형의 문장이 되어 언어중추에 자리했다. 그 때문이었을 거다. 앞서 말한,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문장중 하나다. '국민의 90%가 요정의 존재를 믿고, 저런 요정같은 음악이 차트 1위를 먹는 아이슬란드가 국가부도를 선언한 건, 감히 저런 영적인 세계를 외면하고 금융따위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로 민망한 문장이지만, 분명히 노트에 적혀 있었다.


마지막 곡으로 'Gobbledigook'이 터졌을 때, 무대의 양쪽에서 엄청난 양의 종이가루가 객석으로 뿌려졌다. 엄청난 힘으로 뿌려졌다. 무대 앞만 살짝 커버하는 게 아니라, 공연장 전체로 오랫동안 뿌려졌다. 'hoppípolla' 'Inní Mér Syngur Vitleysingur'같은 밝은 노래들이 연주될 때 터지던 환호가 절정으로 향했다. 앰비언스와 노이즈가 지배하는 곡들에서 보여지던 집중의 에너지가 축제로 승화했다. 앵콜까지 포함해서 총 16곡. 아쉬웠다. 한시간 반이 채 안되는 짧은 공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태고의 음악을 듣고 싶었다. 이미 영혼이 충만한 기분이었지만 인간의 욕심은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에 욕심이다. 마음 같아서는 머틀리 크루를 포기하고, 다음날 도쿄 포럼의 공연을 다시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미 솔드 아웃. 공연장 앞에 티켓 구한다는 우엉남 우엉녀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규어 로스가 빨리 다음 앨범을 내고 또 투어를 시작하길 바랄 수 밖에. 내한공연까지 해주면 좋겠지만 너무 큰 기대일테니, 또 비행기 티켓을 살 각오를 할 수 밖에. 3주 전 봤던 라디오헤드의 공연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봐야할 공연이었다면, 시규어 로스는 살아있는 동안 꼭 한 번 봐야하는 공연이었다. 환율이고 나발이고 하는 경제적 가치를 떠나, 한국이고 일본이고 하는 지역적 한계를 떠나. 인간이라면 꼭 한 번 봐야하는, 그런 공연이었다. 녹음한 음원을 듣는 지금도, 그런 믿음은 흩어지지 않는다. 조금도. 티켓까지 구해주며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래저래 뺀 누구누구들, 평생 후회할거다. (머틀리 크루 공연 후기로 이어집니다)


set list @studio coast
Svefn-G-Englar
Glósóli 
Ný Batterí
Við Spilum Endalaust
Hoppípolla/Með Blóðnasir 
Festival 
Fljótavík
Viðrar vel til loftárása 
Sæglópur
Inní Mér Syngur Vitleysingur 
Hafssól 
Gobbledigook 
------------
All Alright 
Popplagið

by 김작가 | 2008/10/27 19:09 | 스토리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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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간달프 at 2008/10/27 21:51
역시 예상대로 지구의 혼을 느끼셨군요. 이제 음반지름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시는 겁니다!
Commented by 로메슈제 at 2008/10/27 23:14
흑, 전 집에서 heima 디비디나 볼래요ㅠ님 저를 부러워 죽게 만드셨어요.
Commented by j at 2008/10/28 00:50
ㅠㅠ heima 버려야겠다.
기억에서 이 글도 지워야겠다.
환률이고 나발이고 갔어야 됐어 ㅜ
오늘 밤 잠 다 잤네요!! 슬프다 정말 ㅜㅜ
Commented at 2008/10/28 04: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네지다노프 at 2008/10/28 13:04
눈물이 주룩주룩...ㅠ.ㅠ
Commented by 푸른미소 at 2008/10/28 14:04
인간이라면 꼭 한 번 봐야하는, 그런 공연이었다. <<
후기보는데도 가슴이 떨리고 있어요!!!
빌어먹을 엔화는 1600원이 되어가네요ㅠㅠ
Commented by 오므라이스 at 2008/10/29 01:18
우왕ㅋ굳ㅋ
Commented by 릴리스 at 2008/10/29 08:52
50유로 정도의 가격에 기절해 빠리 공연은 못갔는데 부러워요 ㅠㅠㅠ
Commented by Ginger at 2008/10/29 22:25
글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정말로요. 글이 이 정도인데, 실제 공연은 어떨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군요.
Commented by 마키아또 at 2008/10/31 00:06
우리 고등학교 국어선생님도 좋아하시는 음악 ㅠㅠ 공연 보러가셨다니 부러워요~ 전 돈을 더 모아야겠네요~
Commented at 2008/10/31 12: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IHLo at 2008/11/03 15:46
워히터... 기억 나네요. 아아 정말 엄청난 체험이었어요 ㅠㅠ
Commented at 2008/11/05 15: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ansoon at 2008/11/06 09:26
셋리스트 담아갈께요...
Commented by 이 인 at 2009/06/07 00:44
-_ㅜ 저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Commented at 2009/11/21 08:07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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