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금물
주변에 샐러리 맨 친구가 정말 없는 편이다. 음악을 하거나 영화를 하거나 하는 인간들밖에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월급쟁이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기자들 정도? 고등학교 친구들 조차 대부분 의사나 변호사들이고 대학 친구들 중 지금까지 만나는 넘 역시 나와 비슷한 직종에 종사한다. 그러니 세상 물정 돌아가는 걸 통 모른다. 여기서 세상 물정이라고 하면 20대 후반에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결혼해서 애낳고 사는 세상의 물정을 얘기하는 거다. 그 흔한 펀드도 작년 말에 들어갔다가 매달 한숨만 쉬고 있을 정도다. 하여, 나는 내가 또래에 비해 돈을 잘 버는 건지 아닌지, 돈은 어떻게 굴려야 모을 수 있는지, 사교육비는 보통 어느 정도 하고..노후 설계는 어떻게 하고...하는 이른바 인생 설계를 해본적이 없다. 적성에도 안 맞거니와 기회도 없다. 그래서 샐러리 맨들을 만나게 되면 점점 할 얘기는 없어지고 그런 쪽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거의 형식적 대화만 나누다가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일쑤다. 그럴 수 밖에. 내가 인터넷 연예 찌라시 기자도 아니고 가수 누구와 탤런트 누구의 열애설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겠나. 그런데 자꾸 그런 것만 물어보니 일어서야지.

주거래 은행 (그래봤자 원고료및 방송 출연료를 받는 통장이지만)에서 전화를 받았다. 웰스매니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을 보내서 재무설계를 해준다는 거다. 밑져야 본전. 게다가 9월 위기설이니 뭐니 세상이 바야흐로 흉흉한 데 하물며. 시간을 내서 만났다. 월수입을 얘기해주고 보험이나 펀드는 어떻게 하고 이런 얘기를 해주니 종신형 보험은 불필하고 재산운용의 목표는 무엇이며 현금자산과 부동자산과 금융자산은 어떻게 관리하는 게 좋고 이런 설명이 돌아왔다. 아 네, 그렇군요. 아 네, 그렇고 말고요. 대충 그런 대화를 끝내고 보니 매니저 분은 나와 동갑이었다. 결혼은 했고 애가 하나이며 내년에 둘째가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 얘기를 줄줄이... 뭐, 당연하게도 나로서는 상상해본적도 없는 세계다. 그런데요. 저는 만약 결혼한다고 해도 애는 절대 낳지 않으려고요. 사교육비 생각하면 말도 안되잖아요. 아시잖아요. 우리 학교다닐때만 해도 고작해야 월 오만원짜리 그룹과외나 이만원짜리 단과 학원이면 충분했는데 지금은 도대체 얼만가요? 우리 사촌동생 보니까 애가 유치원인데도 벌써부터 자사고니 이런 얘기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인생은 충분히 불행하잖아요. 그렇죠. 요즘 사교육비 심각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하더군요. 초등학교때는 한 명당 월 백. 중학교때는 이백, 고등학교때는 삼백이라고요. 설마, 그럴리가요. 정말입니다. 요즘은 영어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어유치원에 보내죠. 그 돈만 해도 한달에 수십은 금방입니다. 미쳤군요 세상이. 미쳤지요 세상이. 사람이 그러려고 태어나나요? 글쎄요...어떻게 하겠습니까. 태어났으니까 살아야죠. 그렇군요. 매니저님과 얘기를 하면서 다시한번 굳게 다짐하게 됩니다. 절대 애는 낳지 말아야겠다고요.

누군가가 그랬던 것 같다. 아이를 낳으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애를 싸질러 놓고 신경안쓰는 것 만큼 큰 죄는 없다. 금수조차 그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가 지옥이라는 게 문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하는 걸 다 포기해야하니 선뜻 진입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수컷과 암컷 모두 이삼십년을 쥐어짜여야한다는 게 문제다. 이른바 사회적 훈육 시스템을 겪으며 살지 않은, 그야말로 막 살아온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그 단계가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초고속 엘리베이터도 아닌 텔레포트 버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애를 위해서 희생할 인생 따위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어 유치원 보낼 돈이면 한달에 한번씩 여행을 할 수 있는데, 뭐하러 애를 낳아 생고생을 한단 말인가. 아이에게 인생을 희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희생의 범위는 선택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택은 커녕, 몰빵을 해도 패배자가 되는 세상에서 무슨, 어른들은 왜 음악을 안들을까. 사람들은 왜 CD를 안살까를 고민할 수 있단 말인가. 다 그렇게 찌들어 사는 걸 지켜나 보는 거지. 그럴 수 밖에 없는데. 그러기 싫으면 아예 그 세상에 진입을 말아야지.

한 때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스키드 로를 좋아했으며 한달에 너댓권의 책을 읽던 사촌동생들은 어느덧 애엄마가 되어 세시간 내내 학교 얘기와 아파트 얘기만 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중학교 때 삼촌인 나에게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던 큰 조카가 있다. 그는 이제 음악은 무슨....이라며 말꼬리를 흐린 후 밤 11시에 끝나는 학원으로 향한다. 아이나 어른이나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사는 세상이 되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by 김작가 | 2008/09/01 21:01 | 상수일지 | 트랙백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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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꿈의대화 at 2008/09/01 21:23
더러운 세상이죠. 애이 씨발.
Commented by 꿈의대화 at 2008/09/01 21:23
욕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부지와 함께
뉴스를 보고 있자니 이 모든게 너무 엿같아서요;;
Commented by 만나 at 2008/09/01 22:36
크레용은 쥐었으나 아무것도 그리지 않을 셈이군요. 그 또한 용기입니다.
Commented by 오므라이스 at 2008/09/02 00:12
저도 결혼은 해도 애는 절대 낳지 않으려구요. 아이를 낳으면 그 나름의 보람도 느끼기야 하겠지만, 아이에 묶여 살게 될 것 같아요. 사회생활 맘껏 하지도 못하고... 참 거시기한 세상이죠.
Commented by kk at 2008/09/02 00:38
그러나 아이도 없이 홀로, 혹은 둘이 늙어

인생의 마지막에 섰을 때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사람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를 낳으세요. 그리고 불행해지세요. 그게 행복입니다.
Commented by daria at 2008/09/02 01:47
아아 절대동감입니다 저도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에요
Commented at 2008/09/02 05: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yo at 2008/09/02 10:52
나 당신 글이 좋습니다.
가끔씩 와서 캐공감하고 가는 1人
Commented by 사막늑대 at 2008/09/02 10:58
빚내서 집사는것과 애들 뒤치닥거리 하는것 때문에 결혼이후는 사람이 아닌 아저씨, 아줌마로 변신하는거죠~~ 어차피 자기인생이니 선택하기 나름~
Commented by 계란장수 at 2008/09/02 11:47
제 블로그로 출처남기며 스크랩해갑니다
근래 제 여자친구와 이런예기를 했었거든요
Commented at 2008/09/02 13: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아무개 at 2008/09/02 15:35
암요!
전 왜 미처 이런 생각을 심각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불행히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이를 낳고 나서 알게 되었으니..쯧
낳았으니 열심히 키우긴 하겠지만,
힘에도 부치고, 아이도 힘들고.
흑..
Commented by 또이또이 at 2008/09/02 17:56
전 김작가님을 모르지만,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님께서는,
아이를 가지게 되어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뻔하고 재미없는 선택을 하진 않을 것 같아요. 아이에게 비틀즈 노래를 들려주며 가사를 외워 노래 부르게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어도 말입니다.
Commented by hkmade at 2008/09/03 13:07
ㅎㅎ.. 저런 삶속에서 대안을 찾은 부모들도 많이 있답니다. (저도 조만간 그쪽으로 들어가겠지요.) 이제 곧 애아빠가 될 예정이지만 처와 곰곰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수준에서 꿈꾸고 또 이루려는 대안을 고민하고 또 실천하려합니다. ^^
Commented at 2008/09/03 15: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 at 2008/09/03 17:10
얼마전에 우리나라 학교와 외국 학교를 비교하는 다큐를 보았는데.
내가 받은 교육과 우리의 자손 세대들이 받을 교육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도대체 얼마나 잘 살려고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건지...
나라가 잘 못 돌아가도 한참 잘 못 돌아가고 있어요.
Commented by sang at 2008/09/03 20:21
끄덕끄덕,, 헌데 누가 그러더군요.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대상이 생기는 것이 그렇게 좋은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난 굳이 애 안 낳아도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맹목적인 사랑의 정도차이는 무척 클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에게 주는 (다른 누구에게와도 비할 수 없을) 큰 배려, 이해심, 애정등을 겪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것이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아이를 둔 부모가 모두 어른이라던가 그것도 아니겠지만;
Commented by Lily at 2008/09/04 09:50
꿈이 무슨 초등학생마냥 크고 많아서... 꿈을 어느 정도 이루고 나면 아이 낳는 것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_-;
Commented by 이영미 at 2008/09/05 00:32
하루하루가 장비 불충분하게 암벽등반 하고 있는데 옆에서 왜 빨리 안 올라가냐, 왜 애를 안 업고 가냐, 왜 이제서야 올라가냐, 올라가면 뭐 먹을거냐 빨리 가야 된다. 이제 가면 어쩌냐,꾸중에 호통에 잔소리를 듣고 사는 그런 기분.
계획도 있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주위에서 잔소리가 아닌 꾸중을 할 때 마다 더욱 엿같아집니다. 에잇, 100분토론 보자니 또 열받네.
Commented by 릴리스 at 2008/09/05 00:59
최근에 사교육에 대한 시사프로도 봤고 ,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 이야기 듣고 보고 하니까.
너무 우울해요 -_-

저도 나중에 애는 안 낳으려구요.
사교육비는 둘째치고 별로 안좋아하는 거지만;
Commented by 박민지 at 2008/10/29 01:48
ㅋㅋㅋ 저랑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무서워서 애 못낳아요 이런 결심은 나날이 확고해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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