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교차로
기다림은 설레임을 동반한다.
하지만 설레임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지루함만 남는다.
그 날도 그랬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여친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30분 먼저 도착했고
비행기는 30분 연착했다.

한시간 동안
게이트에 우두커니 서서
입국자를 지켜본다는 것은
설레이기보다 지루한 일이었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쏟아지는
각양각색의 입국자들을 제외한다면
줄줄이 터미널로 반입되는
카트의 행렬 밖에
볼 것이 없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된 카트들이
좌우로 꿈틀대며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땅꾼에게 잡힌 뱀이
푸대 자루에 넣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 서있던 곱슬머리 꼬마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꼬마도 아닌 서른을 코 앞에 둔 어른이
저렇게 춤을 추며
지루함을 달랬다가는
당장 공항 경찰에게 체포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어쩌면 특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이
<러브 액츄얼리>의 엔딩 신처럼
드라마틱하면 좋을텐데.
'God Only Knows'라도 틀어놔야 하나.
하지만
음악을 틀만한 전축도 없었고
도착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만남은
전혀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떼지어 나오는 일본인들은
홋카이도의 농부처럼 보였고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의
여행사 직원이었다.

관광객의 설레이는 표정도
여행사 직원에게는
월급을 받기 위한 도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여행이 여행이 아니라니.
역시 '일'이란 잔인하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고
군대 시절 보초 서던 생각까지 날 무렵
전광판에
기다리던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자막이 올라왔다.
입국수속만 끝나면
이 지루함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종지부가 너무 컸다는 게 문제였다.

자동문이 한번씩 열릴 때마다
여친이 탄 비행기의 승객들도
한 무리씩 밖으로 나왔다.
승무원들도.

귀국과 퇴근의 차이는
사람들의 표정에 있다.
일을 끝마치고 퇴근하는
스튜디어스들의 표정은
직장이라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피식민지인들처럼 보였다.

해방감 가득한 그들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S였다.

3년전,
S와의 마지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가던 인사동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같은 방향을 보던 우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
마주 보는 표정은
밝지 않았다.
나도, S도.

S는
평생을 교단에서 봉직했으며
교회의 장로이기까지 한
완고한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던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S는 단 한번도 11시 통금을 어긴적이 없었다.

통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법은
인간의 행동을 시간별로 제한하는 조항을 두고 있지 않으니까.
함께 아침해를 맞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바램 하나가 있다면
함께 여행을 가는 것.
S는 단 한번도
가족을 제외한 누구와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S가
졸업과 동시에
스튜디어스 제복을 입은 것은
여행에 대한 한풀이 같아 보였다.

평생을 교직에 종사했으며
교회의 장로이기까지 했던
S의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게
불만스러웠나보다.
S의 아버지는
S에게 선을 강요했고
S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압력을 피했다.
그 핑계들 중
나의 존재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에 매진했던
S와는 달리
나는
방정하지도
매진하지도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의 생활은
튼튼한 대기업에서 건실하게 근무하고
세 개 정도의 적금통장을 갖고 있으며
신문의 경제면을 꼼꼼히 스크랩해놓는
바야흐로
전도유망한 청년따위는 아니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연체에 연체를 거듭하고 있는 국민연금고지서와
잔고 이십칠만사천팔백삼십육원을 넘겨본 적이 없는
예금통장뿐.

S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런 나의 존재를 집에 알리지 않았고
나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런 나의 존재가 집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S의 아버지의 학교가 있는 동네에서
팔짱을 끼고 걸었던 그 날을 빼고는.

S의 아버지 말을 따르자면
별 거지발싸개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던
나의 정체를
S의 아버지는 캐물었고

거짓말에 능수능란하지 않았던 S는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연체에 연체를 거듭하고 있는 국민연금고지서와
잔고 이십칠만사천팔백삼십육원을 넘겨본 적이 없는
예금통장뿐이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튼튼한 대기업에서 건실하게 근무하고
세 개 정도의 적금통장을 갖고 있으며
신문의 경제면을 꼼꼼히 스크랩해놓는
바야흐로
전도유망한 청년이라
소개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인사동의 카페에서 만난 것은
S가 한달간 아버지의 압력에 시달리고 난 후였다.
"나 너무 힘들어. 더이상 못버티겠어. 회사고 뭐고 다 관두고 싶어."
집을 나오지 그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하면 좋겠어?"

S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 카페에서 움직이는 것은
벽에 걸린
바둑돌처럼 심플한 시계의
시침과 분침, 초침 뿐이었다.
그들만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초침이 180번쯤 움직였다.

"역시 헤어지는 게 낫겠지?"
S는 말 대신 울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애꿎은 물만 들이켰다.
식도가 떨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인사동의 카페를 나온 우리는
평소처럼 안국역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함께 전철을 타고 S의 집까지 간 게 아니라
S는 계단을 내려 가고
나는 계단위에 서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밤은 아직 싸늘했던
3년전의 어느 봄날이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공항 게이트에서 만난 우리는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판돈 3억짜리 포커판에 마주앉은 타짜들처럼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는 마주 서있었다.

인사동의 카페였다면
초침이 14번쯤 움직였을 것이다.
입을 연 것은 S였다.

"오랫만이네. 잘지내?"
"어. 으음... 그렇지 뭐. 여전하네. 얼굴도 더 이뻐졌고."
"4년동안 비행기 타니까 몸만 망가지는데 뭘."
S가 3년동안 적어도 몇차례는 선을 봤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결혼은 했고?"
"비행이 많아서 날짜 잡기도 힘들어."
"만나는 남자는 있는가보네?"
멋적은 웃음이 긍정을 대신했다.

이어나갈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게이트를 빠져나온 여자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침묵이 이어졌을 것이다.

날 보고 달려온 여자친구와
내 앞에 서있던 S는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10여시간의 비행동안
여자친구는 멀미를 했고
여자친구를 보살펴 준 스튜어디스가
S였던 것이다.

이 무슨 고약한 인연이란 말인가.
지금 저 위에서 낄낄거리고 있을
인연의 신에게
가래침이라도 한방,
정확히 이마에
뱉어주고 싶었다.

삼류 포르노영화에서처럼
비행기안에서 둘이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할까.

나와 여자친구, S 중에서
표정을 수습한 것은 S였다.

"참 재밌는 인연이네. 저 ** 학교 친구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
진실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지금 빨리 들어가봐야해서.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나와 여자친구에게 동시에 인사를 건네며 S는
등을 돌렸다.
단정한 웃음을 지으며.
제복을 입은 사람은
표정도 행동도
제복처럼 관리할 수 있구나 싶었다.

내 손에는
S의 명함이 쥐어져있었다.

여자친구앞에서
나는 애써 웃으며
반가움에 겨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제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밴을 기다리며
여자친구가 물었다.
학교 다닐 때 둘이 친했냐고.
이럴 때는 뭐라 해야할까.
"뭐, 그냥 그랬지."
친구로서 친했던 적은 별로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S에게 문자가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핸드폰은 조용했다.
나도 문자를 보낼까 싶었지만
핸드폰을 잡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S의 명함을
빈 담배곽과 함께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친구가 아닌 연인이었을 때도
S의 제복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걸 알았다.

"역시 헤어지는 게 낫겠지?"
3년전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S와 나는 오늘 어떤 관계로
게이트에서 만났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친구 옆에서
3년전 인사동의 카페에서처럼
단숨에 물을 들이키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 매달려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다시,
밤은 아직 차가웠던
차가운 봄날이었다.

2000,2003


Bell & Sebastian - This is just a modern rock song

 


by 김작가 | 2008/04/24 01:31 | go20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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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4/24 06: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4/24 14: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8/04/25 02:29
춤춰봤는데... 안잡아가던데..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8/04/25 02:56
자그니/ 뭔 말이래; 우리 함 뭉칠 때 되지 않았소. 휴학생 신분에 소집하기도 뭐하고 말이지.
Commented by 비리 at 2008/04/25 15:11
자그니 아저씬 잘추니까 그렇죠!
Commented by 처절한기타맨 at 2008/04/26 01:18
오래전 홍대 골목에 벨&세바스티안이란 까페가 있었는디...ㅎㅎㅎ
폼 잘잡는 글쓰기...그리 폼내기 쉽진 않으니 언제나 패스~
Commented by 김작가 at 2008/04/26 04:23
폼 잡은 적 없으니 역시 패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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