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아티스트 <물좀 주소>


리메이크 천국이다. 80년대 노래를 우려먹는 것도 모자라, 이제 90년대 노래들도 버젓이 리메이크란 이름으로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다. 원곡을 능가하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그에 근접한 곡도 찾기 힘들다. 둘 중 하나다. 원곡에 대한 애정따위,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다고 한들,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할 창작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리메이크 앨범과 리메이크 곡이 많이 발표되지만 우리의 그것이 한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 대중음악계의 리메이크 열풍은 오직 이윤만이 장땡인 시대의 음악적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길만한 헌정 앨범이 등장했다. 한대수의 '물좀 주소'를  12팀의 인디 밴드가 리메이크했다. 그 동안 한 아티스트에 대한 헌정은 있었어도, 한 곡에 대한 헌정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비슷비슷한 노래를 열 두번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천만의 말씀. 어어부 프로젝트, 코코어 처럼 굵직굵직한 팀부터 갤럭시 익스프레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불싸조 등 지금 인디 음악계의 가장 뜨거운 팀들까지 골고루 참여한 이 앨범에는 맹세코 반복이란 게 없다. '물 좀 주소'를 리메이크하되, 원곡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나마 원곡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스트레칭 저니의 버전부터 기타 코드 진행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꿔버린 불싸조의 버전까지, 이 앨범은 모양은 같되 색깔은 모두 다른 12색 크레파스와 같다.

각각의 크레파스가 모여 원곡의 아우라를 흐트러 놓는다.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강력한 로큰롤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몽환적 댄스로. 10여분 간 펼쳐지는 코코어의 야성적 사이키델리아는 또 어떤가. 이런 해체작업을 통해 오히려 원곡의 아우라는 더욱 견고해진다. 또한 존중받는다. 어설픈 교집합을 두지 않음으로써 양쪽의 존재를 선명히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물좀주소>에 담겨있는 재기와 상상력은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했던 어떤 헌정 앨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앨범은 색다른 시도와 발칙함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인 헌정 앨범으로 기록될만한 자격이 있다. 2008년 현재 한국 인디음악계의 내밀한 지형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가치를 가진다는 건 물론일테고. 

한대수의 숱한 명곡 중 왜 '물좀 주소'였을까. 만약 내가 이 앨범의 제작자였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 목이 마를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니까. 그렇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물이 필요하다. 대운하만 빼고.


불싸조-물좀 주소
by 김작가 | 2008/04/23 20:25 | 음악이 해준 말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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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호오잇 at 2008/04/29 22:22
포스트 잘 보았습니다.
정말 요즘 리메이크는 리메이크 같지가 않죠.
하지만 이 12아티스트 물좀주소 헌정앨범은 정말 최고입니다.

특히 불싸조가 짱이죠.
Commented by at 2008/05/04 02:01
역시 불싸조같군요.
보컬분께서 간혹하시는 어어어같은 추임새가 들어갔음 더 재밌었을 것같아요~
Commented at 2008/05/04 07: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문수지 at 2008/10/13 02:08
우와- 이 곡, 정말 좋아하는데요, 이런 음반이 나왔었다니-
몇 달전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네-.

한대수...몇 해전 잡지의 인터뷰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다-' 라고
생각 했었는데- 잘 보고 가요-
Commented by 생활의바람 at 2008/10/13 10:37
바로 위 댓글과 똑같은 생각!
이 앨범 꼭 사야겠네요~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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