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톤스의 광합성 그루브

지난 3월 5일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페퍼톤스의 두 남자, 신재평과 이장원이 무대에 섰다. 전년도 수상자 자격으로 금년도 수상자에게 시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마이크 앞에 선 이장원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춤 한번 추지 않고 작년 댄스계를 평정한 페퍼톤스입니다." 그렇다. 이들은 댄스 음악을 하면서도 춤을 추지 않는다. 무대에서 신재평은 기타를, 이장원은 베이스를 연주한다. 펑크나 하드코어 밴드처럼 격렬한 액션을 연주에 입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2004년의 미니 앨범 <A Preview>에 담겨있던 '21st Century Magic'이나 2005년 연말 발표된 데뷔 앨범의 'Superfantastic'같은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을 춤추게 해왔다. 댄스 클럽이나 유원지가 아닌, 자신들의 방에서. 부비부비 댄스가 아닌, 그저 몸가는데로 따라가는 그런 춤을. 구성은 팝이나 록이되 그 안에 담겨있는 건 댄스인, 즐겁게 낯선 음악이었다. 한국에선 만나기 힘들었던 이들의 재능을 다른 뮤지션들도 알아봤다. 엄정화의 9집 프로듀서를 맡았던 지누의 제안으로 그들은 '여왕폐하의 순정'에 작곡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했다. 유희열도 6집 <Thank You>에서 페퍼톤스와 작업하고 싶어했다. 데뷔초부터 인디 음악계의 눈밝은 이들로부터 주목받았던 그들은 어느 덧 음악계 전반의 선수들에게 기대주로 꼽히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2집 <New Standard>를 내놨다. 벚꽃이 피려하는 이 봄에. 

그들은 015B를 많이 닮았다. 객원 보컬을 적극 활용하고 자신들은 작곡과 프로듀싱에 전념한다는 사실이 우선 그렇다. 해외의 최신 경향을 자신들의 음악에 솜씨있게 녹여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중성과 음악성, 양쪽 모두 허투루지 않다. 심지어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도 어쨌든, 닮았다. 그들이 만난 건 카이스트 재학 중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재평은 대전의 펑크밴드들과 어울리며 "난 죽어도 펑크의 길을 가겠어"라 외치던 펑크 키드였다. 이장원은 학내에서 가요제가 열리면 친구들과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 늘 대상을 받아가던 취미 뮤지션이었다. 군문제 등으로 신재평의 밴드가 해산하고 둘은 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방위산업체에 취업하면서다. 한번 시작하면 어떻게든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게 음악에 빠져든 사람의 생리다. 그들도 그랬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둘은 밴드를 결성했고 당시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부야계 일렉트로니카와 기타 팝에 빠져 "세상에 참 좋은 음악 많네"라며 그런 음악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만든 곡들을 인디 레이블 카바레에 보냈고 여섯 곡이 담긴 <A Preview>를 발표할 수 있었다.

공연이 잦았던 것도 아니다. 멤버들이 오랫동안 인디 신에 머물렀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페퍼톤스의 음악은 금새 입소문을 탔다. 이들의 등장은 인디 신에 동기를 부여하는 무게 중심이 영국과 미국에서 일본으로 몇십 센티 정도 이동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멜로디, 한 점 그늘 없이 그저 밝기만 한 감성. 단순하지만 충분히 신나는 비트. 시부야계 일렉트로니카가 아니라 팝을 추구하는 거의 첫 사례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 감성은 1집 <Colorful Expres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댄스와 록, 팝에 세 다리를 걸친 이 앨범은 작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니카 앨범'을 수상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았다. 정말이지, 춤 한번 안추고 댄스 음악계를 평정한 것이다. 

자신들이 평정한 댄스계에 페퍼톤스는 <New Standard>로 아예 쐐기를 박을 것 같다. 신재평은 말한다. "1집을 내고 생각이 명확해졌어요. 우리가 들려줘야할 음악은 우리 밴드만이 들려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장 노래하고 싶은 게 뭔지를 확실히 캐치했어요. 미니 앨범이 짧은 동영상클립이었고 1집이 화성적으로 풍부했다면, 이번 앨범은 가사와 사운드에 담긴 메시지, 그리고 본질적으로 곡에 담긴 에너지가 확실하지요." 이들의 메시지는 밝은 긍정이다. 쨍한 날, 옥상에서 햇볕 받으며 담배 한 대 필 때의 기분이라던가 음악을 들으며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의 느낌 같은 걸 담아내려 했다. "일상속에서 거부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하얀 순간에 창의적인 게 나오더라고요." 그런 기분은 억지로 짜낸다 하여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날씨 좋은 날만 작업했다.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었다. 페퍼톤스가 곡 작업을 하던 좋은 날들의 기분은 앨범에 오롯이 담겨있다. 1집에서 다소 아쉬웠던 늘어지는 부분이라던가 산만함 같은 것들이 싹 빠져있다. 훨씬 몸과 마음으로부터 흥을 돋군다. 1집의 그루브가 청룡열차였다면 2집에선 롤러코스터다. 이 맘 때의 오후, 방에서 이 앨범을 틀어놓고 있으면 볼륨을 10까지 끌어올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하나도 안 시끄럽다. 오히려 신난다. 클럽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몸이 움직여진다. 그래, 춤이란 본래 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날 때 추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문을 쾅쾅 두들긴다. 참고 버틴다. 어느 덧 그의 손마저 페퍼톤스가 뿜어내는 그루브에 맞춰 4분의 4박자로, 하우스 비트로, 록 비트로 바뀐다. 그렇다. <New Standard>는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마저 가능하게 한다. 우울을 원심분리기에 돌려 나온 부스러기조차 끼어들 틈이 없다. 타이틀 곡인 'New Hippie Generation'에 담겨있는 평화와 한적함, 그리고 달뜸과 벅참이 그 부스러기가 들어올 틈을 굳게 틀어막고 있다. 열 네곡 전부에 걸쳐서.

이 앨범을 처음 들은 날은 화창했다. 나는 헤드폰을 끼고 이 앨범을 들으며 홍대앞 거리를 걸었다. 춤을 추고 싶었다. 발걸음과 어깨가 이미 들썩거렸다. 페퍼톤스의 음악으로 몸은 광합성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춤추지 않는다.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 뿐이다. 앨범의 첫 곡 'Now We Go'와 끝 곡 'New Standard'에는 힘찬 국민체조식 구령이 들려온다. 원 앤 투 앤 쓰리 앤 포. 자, 그 구령에 맞춰 함께 춤추자. 함께 만물을 약동하게 하자. 햇볕 쏟아지는 그곳, 바로 거기에 페퍼톤스의 선율과 리듬이 산들거리고 있다.


해안도로

시사IN 원고

by 김작가 | 2008/04/03 18:31 | 스토리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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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ONELINEDRAWING at 2008/04/04 00:13

제목 : Peppertones - New Standard
Peppertones의 새앨범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버스 안에서 들었을 때 최고로 어울릴 것 같다. 한적한 오후, 만원버스가 아닌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있는 여유있는 버스 안. 어두침침한 을지로 쪽 말고 가회동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 쪽. 아니 그보다는 햇볕을 직빵으로 받을 수 있는 남산 1호 터널 직전 올라가는 언덕배기에서 Peppertones의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순 없을거다. 왠지 자가용의 스테레오와는 어울......more

Commented at 2008/04/04 00: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깡통보이 at 2008/04/06 11:13
이글도 쪽팔림ㅋ
Commented by 네이버블로거 at 2009/05/26 14:06
이 글 좀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이글루랑 네이버랑 블로그 연동이 안되는 듯 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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