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커트 코베인에게 감사해야하는가

커트 코베인이 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지도 15년이 다 되간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면 으레 추모와 회고, 눈물이 찔끔 흐를만한 아련한 이야기들이 뒤에 이어지기 마련이다. 여하튼 커트 코베인은 세상을 뒤흔든 후 죽었고 이 시대의 음악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커트 코베인을 빼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무릇 많은 일들이 80년대와 마찬가지로 흘러왔거나 90년대와는 다른 식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비록 긴 머리 찰랑이는 형님들이 빽바지 입고 들려주는 헤비 메탈에 열광했던 세대지만 스스로 90년대의 아이, 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시대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이리라. 이 뿌듯함의 한 켠에는 안도감이 떠오른다. 친구 C 때문이다.  

C로 말하자면 나의 중학교 동창으로서 헬로윈과 임펠리테리, 메탈리카의 위대함을 연합고사를 150일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나에게 설파해준 장본인. 말하자면 내 인생을 사람중의 하나다. 일찍부터 록을 듣는 당시의 소년들이 으레 그렇듯 이미 음악에 빠져들어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된 형을 둔 탓에 조용필이 끝을 장식하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보다는 송골매가 피날레에 등장하는 '젊음의 행진'을 더 좋아했던 친구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느닷없이 공중파방송에 시나위와 백두산, 부활이 출연하자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학교방송에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신청하던 녀석이었다.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 녀석의 목표는 오직 하나, 락커로의 대 변신이었다. 아직 삐삐도 없던 시절이니 C가 록커로 변신하는 중간 과정은 알지 못한다. 다만 스무살의 여름, 근 1년만에 만난 C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온갖 락 클리쉐들의 총집합 같았던 그 충격적 외모란 커트 코베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튼 그래도 신촌의 음악감상실에서는 사자머리와 가죽바지를 입은 형들이 양옆에 언니들을 자랑스럽게 끼고 앉아 메탈리카의 라이브를 감상할 수 있던 시절이다. 나같은 평범한, 고작해야 맥가이버 머리 정도를 흩날리던 사람은 어둠에 파묻혀 스프라이트나 홀짝 거려야했다. 그 어둠을 뚫고 C가 나타났다. 흐르는 노래는 페이스 노 모어의 'Epic'.우선 모자가 눈에 띄였다. 스크린이 뿜는 빛을 받아 검은 마도로스 에나멜 모자가 빛나고 있었다. 오호라, 주다스 프리스트의 롭 핼포드가 머리가 벗겨진 후 애용하는 바로 그 모자로구나.  

모자 아래로는 등판을 반쯤 덮는 긴 머리가 부스스했다. 누노 베텐커트의 찰랑이는 생머리도, 존 본 조비의 요란한 사자머리도 아닌 나이아가라 파마. 아아, 나이아가라 파마란 말이다. 갓 공장에서 출시된 전구의 필라멘트를 머리에 온통 가져다 붙인듯한 그 머리. 전원만 연결하면 그 즉시 120와트의 빛이 뿜어져나와 어두운 음악감상실을 환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옷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가죽 자켓(어쩌면 레쟈였을지도 모른다)의 앞면에는 해골 자수가 놓여있었고 뒷면에는 보무도 당당하게 'I Love U.S.A'가 볼드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공화당원들이 봐도 민망해할게 틀림없을 거대한 크기로. 흐음, 한숨을 들이켰다. 티셔츠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 메가데스의 로고가 찬란히 새겨진 그 티셔츠, 하지만 금빛으로 빛나야할 로고는 얼기설기 갈라져있었다. 나염이 제대로 안 먹힌 '제제'의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들이켰던 한 숨이 결국 나오고야 말았다. 눈을 더 아래로 돌리기가 두려웠다.   

과연, 바지는 예상했던대로 뱀가죽이었다. 물론 무늬만. 뭔가 이상했다. 앞과 뒤의 무늬가 달랐다. 아니 이런, 뒤쪽은 호피무늬가 아닌가. 앞은 뱀이요 뒤는 호랑이인 이 바지는 발목의 끈을 묶지 않은 농구화와 안티 패션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뿔싸. 바지와 신발 사이의 저 양말, 흰 색이었다. 그것도 BYC.  

이 녀석아 딴건 둘째치고 그 바지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음, 원래 뱀가죽을 샀는데 내가 하체가 워낙 굵다보니...그래서 호피바지를 사서 두 개를 합쳤어. 그렇구나. 다 좋다, 하지만 그 바지는 원래 고무줄이 들어있어 그냥 입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신사용 쇠가죽 벨트라니, 할리 데이비슨 벨트도 아니고 말이다. 아아, 허리도 굵다보니 바지가 자꾸 말려서...그런데 세탁소에 수선을 맡겼는데 벨트 구멍을 너무 작게 뚫어놔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벨트를..... 나는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단어를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절망이다.  

제 아무리 락커의 흔적만으로도 온 몸을 던지는 락커 오타쿠 언니일지라도 록커의 세계를 초월한 C의 아방가르드함에는 역시 절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머틀리 크루나 메탈리카가 와서 침을 뱉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그 어처구니 없는 패션에 절망 말고 대체 무슨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한동안 시민들의 눈총, 아니 외면을 받았으며 가족들에게는 응징과 무시를 당했던 C가 환골탈태한 것은 역시 너바나 때문이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상륙한 얼터너티브 붐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다음해 초, 어느 어두컴컴한 카페에서 만난 C는 떡진 단발머리와 빨간 체크무늬 셔츠, 찢어진 청바지와 지저분한 스니커로 나를 맞이했다.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던 표정은 어느덧 그늘진 루저의 얼굴로 바뀌어있었다. 바야흐로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묻는다. 만약 커트 코베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여러 가지가 달랐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쩌면 나는 아직도 에나멜 마도로스 모자에 나이아가라 파마, 악어와 호피를 덧대 만든 바지에 I Love U.S.A가 아로새겨진 가죽 점퍼를 입고 도도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C를 만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세상을 구원했던 게다. 최소한 영원히 외면과 응징을 받으며 살아갈 게 확실한 한 청년의 인생만큼은. 다시 한번 커트 코베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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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 디비디도 나오고, 중국여행도 가는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단행본에 들어갈 원고입니다.  

by 김작가 | 2008/02/01 06:04 |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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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unanium at 2008/02/01 11:20
아..저도 90년대 말에 20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다 싶어요. 저에게 있어서 진정한 90년대의 종말은, 신촌의 빽2가 문을 닫았던 때가 아닌가 싶네요.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hyangii at 2008/02/01 12:21
ㅠ_ㅠ 잼있습니다. 잼있어요~
Commented at 2008/02/01 15: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pist at 2008/02/01 18:17
커트코베인에 관한 뻔한 글인지 알았다가
반전에 놀라며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음악이야 허스커듀니 픽시즈니 블랙플랙이니 영향을 감지하지만
모든게 재조합된 패션과 그의 태도는 정말 독보적인 것이었죠.
대한민국에 찌어진 바지와 컨버스 형태의 스니커즈를 제대로 샹륙시킨건
마케팅도 광고도 협탄도 아니라 바로 커트코베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난 글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말쓰걸 at 2008/02/02 00:55
'제제' 이름에 깜짝 놀랐습니다. 한때는 여러 아이템 사고 싶었다는.
Commented by 신경꺼 at 2008/02/02 07:35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던 표정은 어느덧 그늘진 루저의 얼굴로 바뀌어있었다." 이 부분에서 폭소를 했습니다.
글을 참 맛깔스럽게 잘 쓰시네요.ㅋㅋ
세상사가 어찌보면 참 재밌는 것 같아요.ㅋㅋ
Commented by breeze at 2009/04/07 05:50
(늦은 덧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어서요..) 나이아가라 파마에 BYC 흰색 양말에 신사용 쇠가죽 벨트는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호기양양한 도도한 롹커의 패션이네요. 왠지 그립습니다. ㅎㅎ 잘 읽고 갑니다. (참, 링크는 한달 전 쯤에 했습니다.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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