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대결

대학에서 음악감상 동아리를 했었다. 돌이켜보면 상당한 오타쿠 집단이었다. 모든 용돈을 판사는데 쓰느라 술도 안먹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친구는 전혀 특이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리스펙트의 대상에 가까웠다. 어떤 선배는 거룩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택시탈거 버스타고 버스탈거 걸어서 판을 사자." 이 금과옥조의 명언은 종종 단체 행동을 하는데도 촉매제가 되곤 했다. 알바를 기가막히게 잘 물어오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의 주무기는 주로 교통량 조사 알바였다. 그러니까, 서울시내의 특정 지점에 하루종일 서서 시간대별로 차가 몇대 지나가는 지 세어서 보고하는 알바였는데, 선배가 이 알바를 물어오면 회원 모두가 새벽같이 일어나 서울시내로 흩어져서 교통량을 조사 한후 일당을 받고 모여서 단체로 청계천으로, 타워레코드로, 신나라 레코드로 판을 사러 갔다. 그때 우리에게 CD란 지금의 mp3와 비슷한 느낌이어서, 오직 LP만이 가치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조금은 그랬던 것 같다.) 94년을 기점으로 LP를 찍는 회사가 조금씩 줄어들고 95년에는 (아마도) EMI를 끝으로 신보의 LP가 발매되는 일이 없어졌다. 소니뮤직(현 소니비엠지), WEA(현 워너뮤직) 등이 하나 둘 씩 LP생산을 중단하고, 창고에 남아있는 물량을 놀라운 가격에 떨이처분했을 때, 동아리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흥분 그 자체였다. 전날부터 들뜬 기분으로 밤을 새다시피하고, 아침일찍 행사장으로 달려가 그야말로 가진 돈을 총동원하고 빚까지 내서 레드 제플린, 도어스 등의 LP를 싹슬이해오다시피 했다. 장안의 매니아들과 전쟁을 벌여 누가 먼저 득템하느냐의 전쟁이었다. 그건 마치,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창 펀드 수익률이 100%네 200%네 하는 이야기가 떠돌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1년만에 600%를 챙겼더라 하는 영웅담이 퍼지자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고 등록금 융자를 받아가며 증시와 펀드에 몰빵하는 풍경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소장 음반 천장을 돌파하면 자축 파티를 열고,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해외 중고 음반 업자와 몇 통의 편지와 거래 확인증이 오가며 몇달만에 희귀 원판을 구입하는 모습은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었다.

어제 그 동아리의 창립제에 갔다 왔다. 그때의 열혈회원들이 꽤 많이 모였다. 보통 어지간한 동아리에 가면 음악은 무슨 음악, 와인이나 마시고 골프나 치자 이런 분위기인 반면, 그들은 여전히 오타쿠였다.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일본 출장가면 현지에서 희귀음반을 싹슬이 해오고,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온갖 음반거래 사이트를 뒤지며 레이블 단위로 음반을 털고, 해외 레코드 가게에서 하도 음반을 뒤져대서 손가락 끝에 때가 빠질 날이 없으며 심지어는 굳은살 까지 박힐 정도의 그런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오타쿠의 삶이란 과연 한 군데 머물지 않는 것인지, 우리 동아리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선배는 음반 말고도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를 수집하는 취미가 더 늘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창고에 한가득이라고 했던가. 하아. 동기 중 이미 문자 그대로의 오타쿠 아우라를 입학때부터 풍기던 녀석이 있었다. 졸업하고 그 기질을 살려 희귀음반 구매대행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건 예전에 들었는데, 어제 건너건너 녀석의 최근 근황을 알게 되었다. 인디 게임 평론가로서 그 동네에서는 가히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쪽 오타쿠계의 블로그에선 녀석의 아이디를 거론하며 "**님이 추천하신 바로 그 게임입니다"라는 게 일종의 보증수표라고 한다.)
아니, 어떻게 그리 크지도 않은 학교의 작은 동아리에서 이런 기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있는가, 자못 놀라며 술을 마시다가 기차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02학번 후배 하나가 슬며시, 마치 어둠속에서 배트맨이 천장에 매달려있다가 얼굴을 내밀듯 말을 꺼냈다. "제가, 일본 기차 매니아라서 잘 아는데요...." 허억, 이것은 말로만 들었던 바로 '철광'이 아닌가. 오타쿠의 끝, 그 끝 중의 끝이라는 막장 오타쿠, 철광 말이다. "저는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에요. 그래도 아직 서울 지하철 표도 다 모으지 못했으니까...."

졸업생들 몇몇이 봄에 단체로 일본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본 가면 보통은 어디 가면 뭐가 맛있다더라, 어디 가면 무슨 옷을 싸게 살 수 있다더라,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러나 어제 오간 이야기는 디스크 유니언에서 이번에 누구의 음반을 LP슬리브로 재발매하고, 어디가 어디보다 음반을 싸게 살 수 있는데 의외로 물량도 많고 음반 상태도 민트가 많다,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덕후가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하하호호 웃으면서 끊임없이 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찌그러져있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 와중에 값진 정보를 얻어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으로 2008년 첫 지름을 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USB 턴테이블. 말 그대로 USB단자가 달려 있어 컴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턴테이블이다. 이로써 그동안 쌓아만 두고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LP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야호.



결국, 2008년에는 더이상 뭐 지를 게 없겠지라 생각했던 얄팍한 예측은 일주일도 안되서 끝나고야 말았다......

by 김작가 | 2008/01/06 20:01 | private press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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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1/06 20: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1/06 21: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1/06 22: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북풍 at 2008/01/06 23:45
LP가 사라져 갈때 많이 아쉬우셨을듯 하네요
저는 지금 cd가 곧 사라져 버릴거 같아서 아쉽네요 ^^
저도 일본여행가면 제일 먼저 음반을 사러 갈 것 같네요
물론 매니아나 오타쿠 정도 까진 아니구요 좋아하는 아티스트들 음반을 현지에서 사볼까 하구요. 중고로 싼가격에 살 수 있는 곳도 있다고 해서..

usb턴테이블에 관심이 가네요.
좋아하는 가수가 LP판을 몇장 이벤트성으로 발매 했는데 그거 몇장을 위해서 사기에는 조금 낭비겠죠 ? ^^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오므라이스 at 2008/01/07 00:54
USB 턴테이블?? 고건 첨보네요. 신기...
Commented at 2008/01/07 11: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jh at 2008/01/07 12:24
눈 앞에서 상상이 가... 웃겨 죽는줄 알았습니다
내주변 덕후들 생각도 나고...
Commented by 태엽이 at 2008/01/07 12:45
역시~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입니다. 저분들에 비하면 전 노멀 싱크로.
Commented by 젊은미소 at 2008/01/08 07:05
크, USB 턴테이블. 저도 하나 사고 싶은데.. LP들을 모두 한국에 두고온지라 쓸 일이 없군요. ㅠ_ㅠ

그건 그렇고.. 미국서는 이 USB 턴테이블이 오타쿠 아이템은 아닙니다. 소위 "마트"인 Costco에서도 얼마 전에 불과(?) 60불에 세일을 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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