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인사
"올해는 몇 점 짜리 인생을 살았어?"라고 누가 물었다.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학점으로 평가해보자면 B정도는 됐던 것 같다. 2007년은 미니홈피를 떠나 이글루스에 둥지를 틀었고, 결과적으로는 참 잘한 선택이 됐다. 글로 밥을 먹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글을 썼고 고정 지면도 많아졌다. 물론 대부분의 글은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부끄럽다. 과연 내가 쓰는 글이 얼마나 가치있는 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대답을 못한다. 먹물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필요한 얘기들을 해야한다, 라고 진모선생님이 그랬는데 마감에 쫓겨서 마구 써내려간 그 글들이 세상에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한 편으로는 미묘한 정치적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아마 계속해서 당면하게 될 고민일 것이다. 새로운 일도 많이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EBS스페이스공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건, 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단 후 가장 뿌듯한 일이다. 스페이스 공감이 내년부터 조금씩 바뀔 지도 모르는데, 요즘 생각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의 허리잇기'라는 화두를 어디까지 실현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나가면 나를 포함한 2명만 아직 싱글이고 전부 애아빠인 지경에 이르렀다. 동생이 먼저 장가가서 그나마 압박을 면할 수 있게 된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두가지 생각이 공존한다. 결혼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내가 과연 결혼할 물적, 심적 준비는 되어있기나 한건가. 올해 대학원에 들어간 건 그 고민의 대답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던 까닭도 있다. 압박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년 다니고 휴학하기로 했다. 대학원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기초적 소양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이유다. 여기가 다른 문화컨텐츠나 문화경영과는 달리, 꽤나 이론 중심의 코스라 읽어야할 책도 많고 사전에 알아둬야할 지식도 많다. 책읽을 시간이 없고 사전에 알고 있는 건 더 없으니,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쨌든 대학원 생활을 통해 스스로의 무식함을 깨닫게 됐으니 나름대로 성과라면 성과다. 그래서 요즘 철학, 미학 관련 책을 바짝 읽기 시작했다. 옛날에 알고 있었으나 까먹은 것들을 다시 집어넣고, 머리를 싸매고 노트필기까지 해가면서 읽으려고 한다. 그러나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됐다고 하여 바로 써먹지는 않을 것 같다. 아직 내 언어가 되지 않아서다. 벤야민이 어쩌고, 인식론적 성취가 어쩌고 하는 건 그 사람들의 말이지 내 말이 아니다. 나는 글이란 무조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대중매체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글이 어려운 건, 쓰는 사람도 자기가 쓰는 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다. 잘 알고 있다면 쉽게 쓸 수 있다. 자기 언어로 쓸 수 있다. 지식을 스스로의 언어로 만드는 건 그래서 2008년의 가장 큰 과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좀 해야겠다. 신년에는 아무래도 날을 세울 일이 많아질 것 같은데 좋다고 생각하는 걸 지지하기는 쉽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 비판하는 데는 더 강한 논리와 학문적 맥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도 공부를 해야한다. 철학없는 욕망은 무모하고, 욕망없는 철학은 공허하다고 나는 믿는다. 철학과 욕망을 결합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8년이 어떤 해가 될지는 역시 알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만 해도 그동안 연재해오던 매체 하나가 폐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밴드로 말하자면 멤버가 아닌 세션 인생인 나로서는 개편에 따라 희비가 갈릴 것이고, 수입이 요동을 칠 것이다. 그런 불안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하기 위해서 책쓰는 일을 시작할 것 같다. 책 팔아서 돈 벌 생각은 감히 없고, 한국 출판시장에서 음악관련한 책으로 돈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지만 길거리에서 내가 쓴 글이 실린 신문이나 잡지가 마구 굴러다니는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서라도 책 쓰는 건 필요하다. 그와 관련해서 내년이 어떤 한 해가 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두 개의 일이 있다. 하나는 연초에 사람들 몇을 모아서 작업실을 만들기로 했다. 이미 11월달쯤부터 얘기가 구체적으로 오갔던 건데, 연초에는 성사가 될 것 같다. 카페 메뚜기 생활을 접고 내 공간이 생긴다는 건, 이 공간과 모여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긴다는 거다. 일단 자기 일을 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과 해야할 일들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연초에 나올 첫 단행본이다. 필자에서 저자가 된다는 게,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고 싶다.

이글루스를 시작한지 6개월이 됐는데,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메이저 블로그가 된 건 다행히도 아니지만 허접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댓글에 일일히 답은 못했지만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좋은 한해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새해에는 허접한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by 김작가 | 2007/12/31 17:55 | private press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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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선생 at 2007/12/31 19:11
'지식을 스스로의 언어로 만드는 것'이란 말이 참 와닿는군요.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새삼 저도 그런 방면으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건필하십쇼.
Commented by hotcha at 2007/12/31 22:59
모국어로 된 책을 구할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하고,
책장 가득한 서가에 앉아 책을 맘껏 읽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그렇다고 지금보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을까, 더 좋을 글을 쓸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책 없이 오래 살다보니 책 대신 내면을 읽고 사유와 노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쓰기 쉽진 않지만 편안한 글이 마음에도 와 닿는다는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EBS와 잠깐 인연을 맺었었는데 기획위원이시라니 왠지 반갑습니다.
Commented by 동경 at 2007/12/31 23:00
몇 년 전에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단어가 길거리에서 남발되던 시절, 친구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뭐냐고. 그랬더니 이래저래 설명은 하는데 도통 못 알아듣겠더군요. 어딘가에서 읽은 책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달달달 외워서는, 저한테 그대로 읊는 것 같았어요.
그 일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나는 글이란 무조건 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 글이 어려운 건, 쓰는 사람도 자기가 쓰는 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다. 잘 알고 있다면 쉽게 쓸 수 있다. 자기 언어로 쓸 수 있다" 라는 글귀를 보고 갑자기 생각났고, 또 화들짝 놀랐습니다.
맞는 말씀이세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2008년에도 주옥같은 글 많이많이 써주세요. 물론, 그러기 위해선 김작가님께서 평안하셔야겠지요? (웃음)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오므라이스 at 2007/12/31 23:00
재미있는 글 많이 써주셔서 보는 사람도 즐거웠는걸요. 2008년에도 건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꿈의대화 at 2007/12/31 23:09
올해 라이브 블로그가 제대로 열렸다면 추천했을 겁니다. "올해의 발견"으로요.
Commented at 2007/12/31 23: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신발롬 at 2008/01/01 00:12
"글이 어려운 건, 쓰는 사람도 자기가 쓰는 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다."
초공감입니다. 쉬운 걸 어렵게 쓰는 것보다 어려운 걸 쉽게 쓰는 게 훨씬 훌륭하다고 봐요.

이 표현은 너무 식상해서 말하는 순간 촌스러워질 지경이지만 그래도 역시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내셨군효. 흣. 일단 단행본 나오면 낼롬 사서 날카롭게 읽겠습니다. 음하하.
조만간 홍대에서 주(酒)님 모시고 뵙지요~
Commented by CUTNPASTE at 2008/01/01 00:50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닌 경험이라는 것을 김작가 형님의 '섹시토크'를 통해 배웠습니다.

2008년에도 정진해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8/01/01 10:10
2007년 김작가님 블로그를 만나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2008년도 건필하세요!!
Commented at 2008/01/01 14: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쑴별 at 2008/01/01 14:39
다이시댄스를 김작가님의 홈에서 알게 된 뒤로.
막연히 고마운 마음 가지고 있어요.

좋은 하루. 좋은 새해 되세요^^
Commented by 케인 at 2008/01/01 17:55
한거라고는 읽은것 밖에 없는데... 이게 바로 불로소득??
예전에는 패션잡지(보그한2년?)를 정기구독도 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잡지에서 가장 즐겨보는 글은 음악관련 글이더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jay at 2008/01/02 00:39
한해 동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_^
Commented by 낭만여객 at 2008/01/02 03:14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ㅎ
Commented by 루시 at 2008/01/02 09:12
그들의 말이 아닌 나의 말로 쉽게 쓰는 게, 논문 쓰는 것 보다 더 힘든 최종과제인거 같네요. 김작가님의 말에 동감. 2007년 내내 그들의말도 제말도 아닌 요상한 페이퍼쓰는것을 자학하다가 여기와서 무엇이중요한지 다시한번 알게되었네요. : )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한해동안 고마웠습니다.
Commented by 소코트라 at 2008/01/09 20:22
어렵게 쓴글이 쉽게 읽히고,
쉽게 쓴글은 어렵게 읽힌다죠.

어렵게 고민하며 쓰신글 넙죽넙죽 쉽게 먹고 있습니다:)
생유- 올해 이비에스 공감도 기대되네요. 으랏차-
Commented by 민지 at 2008/01/10 00:31
작업실오픈파티꼭하세요.~
기대하고있샤요. 올해도 화이팅!
Commented by 트랄랄라 at 2008/01/16 10:36
늦게라도 새해 인사 드립니다! 파이팅을 외쳐드리기 위해!!
언제나 즐겁게 지켜 보고 있는 김작가님의 이글루스입니다~
글이란 무조건 쉬워야 한다, 적극 동감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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