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이별

그녀가 그와 헤어진 뒤 다른 남자들을 만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서, 오랫동안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드러냄에 절대 망설이지 않을 수 있던 관계끼리의 육감이었다. “뭐해” “영화봐” 또는 이랬다. “뭐해” “누구만나” 똑같은 말이라도 질문과 답변 사이에 몇 초의 공백이 있느냐 따라서 누구와 영화를 보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론 공백이 전혀 없었다. 보통 “아무것도 안해”라는 답이 돌아올 때였다. 그것은 곧 놀아달라는 말이자 만나던 남자랑 헤어졌다는 의미였다. 그녀에 대해 미련은 없었으되, 외로워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던 게 그의 마음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투정을 들어주고 헤어지곤 했다. 더 이상 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인의 습관적 행동은 헤어진 뒤의 만남에서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기댔고 그는 챙겼다. 섹스는 하지 않았다. 그와 그녀 모두에게 그건 선을 넘는 거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앞으로 나가도 부족할 판에 과거로의 회기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패턴이 지속되던 어느 날, 그는 또 한 번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뭐하니” 답장이 돌아오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어. “남자친구랑 있어.” 윤활유를 듬뿍 바른 쇠구슬이 마찰계수 제로의 금속판을 굴러가는 듯, 어떠한 감정의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 일곱 개의 글자였다. 순간 그는 느꼈다. 말로 이별했고, 행동으로 이별했다. 그녀는 이제 마음으로 이별한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더 이상 자신을 챙길 필요가 없다고 그는 이번의 답문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별이란 무릇 이와 같다. 헤어져, 라고 말한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버리는 건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종료지만 마음은 남아있다. 그래서 미련이 생기고 이별의 아픔이 찾아온다. 당분간 만나지 않고, 연락도 끊는 절차가 필요하다. 행동으로서의 이별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음으로부터의 이별이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상대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은, 심지어 새로운 연인과 거리를 걷다가 옛 사랑과 조우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단계에 이르러 남자와 여자의 이별은 최종형이 된다. 모든 관계는 과거가 되고 사건은 추억으로만 남는 단계, 현재 시점의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단계 말이다. 그와의 관계가 이제 그런 단계에 이르렀다고 그녀는 한 통의 문자 메시지로 알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명료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미련은 없었다. 그러나 선뜻 다른 남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잘 됐다고 축하 메시지를 보낼 여유도 없었다. 그녀가 문자 메시지로 ‘누구랑 있어’라 말할 때와, ‘남자친구와 있어’라 말할 때의 느낌은 그토록 달랐다. 예견은 하고 있으되, 준비도 되어 있었으되, 막상 실제로 벌어졌을 때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답장하기를 포기하고 종료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은 물었다. ‘작성하던 문장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예와 아니오, 어느 하나 그는 선택하지 못하고 슬라이드를 닫았다.

일간스포츠 섹시토크 원고

by 김작가 | 2007/12/31 15:56 | 어른들의 놀이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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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ermes at 2007/12/31 18:30
이 글 좋네요. 연말에 읽어서 두 배로 공감이 갑니다. 흑.
Commented by JOY♪ at 2008/01/02 13:39
마음으로부터의 이별!
저도 이제 그 단계만 맞이하면 완벽한 이별이 되겠군요.
Commented by 希望 at 2008/01/08 16:39
인정해야하는 아픔의 글이네요...

어서 그 단계로 오르길..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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